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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에게 부장 새끼가 있다면 M에게는 탐욕적이고 몰염치한 지도 교수가 있었다. M은 교수 새끼가 자기 지위를 이용해 어떤 식으로 패거리를 만들고 학생들을 부려먹고 동료 교수들을 엿 먹이고 예산을 빼돌리고 연구 실적을 조작하는지 분한 목소리로 늘어놓았다. L에게는 간섭이 심한 데다 거들먹거리는 시어머니와 개념 없고 더러운 앞집 남자가 있었다. K에게는 M의 교수 새끼와 비슷한 선배 새끼와 쪼개고 쪼개 써도 답이 안 나오는 월급이, H에게는 게으르고 눈치 없는 남편과 동생네만 편애하는 엄마가, W에게는 빌어먹을 돈과 대출이자와 짠돌이 사장과 손해 보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뻔뻔한 친구가, N에게는 계약직의 부조리함과 비열하고 이기적인 회사 사람들과 월세를 올려달라는 집주인이, C에게는 여자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거의 일곱 시간 간격으로 다투는 애인 K가, 또 다른 L에게는 매일 혼자 집에 있을 걸 생각하면 애처로운 심정에 눈물부터 쏟게 되는 애완견 달리가 있었다. 책을 잃어버렸다는 내 고민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래서 ‘글을 못 쓰고 있어’라는 말은 감히 꺼낼 수가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나는 어쨌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몇 안 되는 인간 중 하나이며 가난은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고 어떤 드라마 작가나 베스트셀러 작가는 으리으리한 부자이고 글이 안 써지면 여행을 가거나 새로운 경험을 해보거나 그냥, 포기하면 되니까. 그런데…… 그렇다면, 그들의 고민도 비슷한 방법으로 해결 가능하지 않은가. 이직하고 이혼하고 이사 가고 일 더 하고 폭로하고 강아지 한 마리를 더 분양받아 몰리라고 이름을 지어주면 되지 않는가. K가 늘 그런 식이라고, 그래서 싸우지 않을 수가 없다고 C는 말했다. 아니, 나는 해답을 내놓으라는 게 아니라 내 감정을 봐달라는 건데 걔는 내 말에 자꾸 정답을 들이미는 거야. 그건 이렇게 하면 되잖아. 뭐 그런 걸 갖고 그래? 이러면서 나를 천하의 등신으로 만들어버린다니까. 대화가 완전 스피드 퀴즈 같고 어떨 때는 걔가 내 애인인지 직장 상사인지 헷갈린다니까. 아니 내가 그걸 몰라서 그러나? 나도 어떻게 하면 되는지 다 알아. 알지만 못 하는 거잖아. 드럽고 치사해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그런 걸 공감해주면 좋잖아. 공감 능력이 전혀 없다니까, 걔는. 나는 책장에 꽂힌 책을 하나하나 꺼내 훑으며 C의 말을 들었다. 사람들의 분노와 우울과 고통을 듣다 보면 그 책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렬해졌다. 그 책에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삶의 진리 같은 게 들어 있어서, 그 책을 읽고 나면 그들에게 그럴듯한 대꾸를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주는 무자비하다니까. 지구는 돌연변이라니까. 하지만…… 어째서 무자비한지 알게 되면 사는 게 좀 달라질까? 내가 왜 글을 못 쓰는지 알게 되면 다시 글을 쓸 수 있나? 근의 공식을 안다고 모든 방정식을 척척 풀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아니다. 일단 찾자. 그 책을 찾기만 하면 사람들의 말을 좀 더 집중해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들으며 공감하다 보면…… 공감. 그게 과연 인간의 영역인가. 돌고래는 그런 걸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그것이 없거나 아주 희박하다. 인간이면 인간으로서 일단 상상해야 한다. 내가 저 사람이라면 어떨까, 하고. 그러니 공감 이전에 필요한 건 상상력이다. 부장 새끼도 교수 새끼도 선배도 사장도 시어머니도 친구도 남편도 앞집 남자도 다들 상상력이 없어서 그러는 거 아닐까. 없거나, 귀찮거나, 두렵거나.

네가 속상하고 힘들 만하네. 이 말 한마디 해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C가 물었다. 마치 K에게 묻듯이. 그런데 나는 K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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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도둑질하는 사람한테 도둑질하면 안 된다고 말하기는 쉽지. 아, 네가 도둑질을 할 수밖에 없구나, 라고 말하기가 힘들지.

나는 최대한 K와 다르게 말하려고 애쓰면서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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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내가 그런 나쁜 짓을 하고 다니는 건 아니잖아!

C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나는 어쩐지 K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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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넌 별일 없어?

겸연쩍은 침묵 뒤에 C가 내 안부를 물었다. 나는 없어진 책을 찾느라고 며칠째 아무것도 못 하고 있다고 말했다. 뭔데. 무슨 책인데. 중요한 책이야?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찾아서 읽어봐야 알 것 같아. 뭐야. 읽어보지도 않은 책을 잃어버린 거야? 그럼 새로 사면 되잖아. 그 책은 살 수가 없어. 왜? 서점에 없어? 중고 서점이라도 뒤져봐. 살 수는 없고 찾아야 해. 뭐 그런 게 있니. 누구, 특별한 사람이 준 책이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뭐야. 뭔데 그러는 건데. 뭐라 말하기는 어렵고…… 아무튼 찾아야 해.

C는 우리의 대화를 답답해하고 있었다.

그냥 새로 사. 괜한 데 시간 버리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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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가 덤덤하게 말했다. 나는 어쩐지 K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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