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날 때 어머니가 태를 흘려보냈던 낙동강과 마을 앞 비룡산의 모습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내가 태어날 때 어머니가 태를 흘려보냈던 낙동강과 마을 앞 비룡산의 모습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72년만에 돌아왔습니다.”

이제 일본인이 된 노학자의 귀향길은 멀고 멀었다. 현해탄 바다만 건너면 되는데도, 식민지·분단의 세월은 그가 90줄을 넘기고서야 길을 열어주었다. 그 사이 조선소년 이구조는 일본에서 ‘실크로드 연구의 신’으로 불리는 92살의 대학자 가토 규조로 바뀌어 있었다.

유년시절 자랐던 곳은 경북 칠곡군 약목면 양지마을. 호적상으론 죽은 사람이었다. 고국과 단절된 채 70여년이 흐르면서 한국말을 잊어버렸다. 그는 42년 일본군 입대 직전 들렀던 고향을 4달 전 72년 만에 찾아갔다. 앞서 그는 2년 전 <마이니치>신문 인터뷰에서 조선 출신임을 밝혀 일본 학계를 놀라게 했다. 기사를 본 박천수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의 주선으로 그뒤 고국에 올 수 있었다. 조카 이하수(84)씨와 감격적으로 상봉한 뒤 찾아간 양지 마을 풍경은 유년시절과는 하늘과 땅 차이로 변했다. “하지만, 낙동강과 마을 앞산인 비룡산만은 변치 않았더군요. 그게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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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절인 3일 오후 대구 경북대 박물관에서 가토 박사의 강연이 열렸다. ‘낙동강에서 아무다리야까지-가토 규조 불굴의 인생과 학문’이라는 제목의 강연회는 박 교수와 가토의 원래 집안인 광평 이씨 문중이 마련했다. 두번째 고향방문을 맞아 열린 이 자리에서 가토는 꼿꼿이 앉은 채로 파란만장한 자신의 학문편력을 또박또박한 어조로 풀어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운명을 새로 개척하고, 남들 하지 않은 것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살아왔다”고 했다.

“한반도 문명의 젖줄인 낙동강을 통해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실크로드 젖줄 아무다리야강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 것도 그런 인연 덕분이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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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탓에 솔잎 긁어모아 땔감으로 팔면서 소학교를 다녔던 그의 인생이 풍운에 휩싸인 것은 4학년 때다.“담임 선생 교탁에 ‘조선독립만세’낙서가 쓰여졌어요. 주모자로 몰려 조사 받으면서 학교가 두려워졌어요. 마침 일본 야마구치현에서 갱목을 나르던 둘째 형이 함께 일하자고 하더군요. ”

일본에서 형과 일하며 고학해 중학교 검정시험을 마쳤다. 교원을 거쳐 도쿄 조치대 독문학과로 진학한 그는 1942년 전황이 급박해지자 만주 퉁화현의 일본군 부대에 입대한다. 직전 고향을 잠시 찾았다.“작별인사하고 문을 나설 때 부친의 통곡소리가 들렸어요.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부모님은 한국전쟁 때 병으로 돌아가시고 화장해서 무덤을 안썼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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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 뒤 소련군 포로가 됐다. 시베리아로 끌려가 50년 귀환 때까지 철도건설 등 노역을 했다. 살아남는 게 다급한 시절, 대학시절 탐독한 사상가 파스칼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금언을 되새기며 틈틈히 익힌 게 러시아어였다. 억류에서 돌아올 즈음 러시아어 달인이 됐다. 귀향하고 싶었지만, 곧장 한국전쟁이 터져 연락이 끊겼고, 러시아어 실력 탓에 간첩으로 몰릴 것이라는 주위 우려로 귀국길을 접고 귀화를 택했다.

“대학 졸업하고,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시베리아 문화사를 연구하게 됐어요. 포로 때 익힌 러시아어가 기반이 됐어요. 63년 <시베리아사>를 냈는데 국내외 반응이 좋아 답사까지 가게 됐어요.”

아시아 민족지, 문화사 연구가 발달한 러시아 학계의 연구성과까지 섭렵한 그는 1910~20년대 일본 민속에 정통했던 러시아 학자 니콜라이 네브스키의 전기를 내는 등 독보적 전문가로 우뚝 섰다. 오사카 국립민족학박물관 교수로 재직하다 75살에 정년을 맞았지만, 중앙아시아로 관심을 돌려 우즈베키스탄 아무다리야강 일대의 간다라 불교사원터인 칼라 테파 발굴에 몰두했다. 중앙아시아 불교유적 변천사에 관한한 최고의 전문가로 입지를 굳힌 그는 지금도 일년에 3~4개월을 발굴현장에서 보낸다고 한다. 여지껏 펴낸 저서 60여권은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문화사의 가장 권위있는 정전으로 꼽힌다.

“열심히 움직이고 많이 먹고 마시는 것”이 건강비결이라고 밝힌 그는 강연 뒤 손수 지은‘아무다리야의 노래’를 힘껏 불렀다. 경북대생들과 뒷풀이자리에서 삼겹살에 소주를 걸치며 담소도 즐겼다.“제 출신지도 밝혔고, 고향까지 다녀왔으니 마지막 소원을 이룬 셈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가까우니 사이좋게 지낼 시절이 꼭 올 겁니다. 다만, 친구들 가운데 고향에 갔다와서 이승을 떠나는 이들을 종종 봤는데, 저도 그리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대구/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