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화당)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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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석굴암(국보 24호)은 한국 미술사의 보배다. 하지만 잃어버린 보물들도 꽤 된다. 본실 안 오중탑과 본실 주벽 부조상 위 감실 불상이 대표적이다. 본실 본존불과 그 뒤편 11면관음보살 부조상 사이 있었다는 오중탑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중인 천불천탑(1913년 1차 보수공사중 발견)과 한쌍인 석굴암 내부 탑이다. 1909년 소네 아라스케 조선 통감이 방문한 뒤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살상 등이 들어찬 감실은 모두 10개인데, 그중 본실 입구 좌우쪽 감실 두곳이 비어있어, 그 안에 원래 2구의 불상이 있었다는 게 통설이다. 문화재학계는 이 유물들을 일본인들이 훔쳐간 것으로 보고, 가장 시급히 환수해야할 문화재라고 역설해왔다.

석굴암의 원래 부재와 옛 사진을 비교해가며 석굴의 원형을 연구해온 한정호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가 최근 파격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두 감실에 애초 불상이 없었으며, 실제로는 본실 바닥에 있다고 생각해온 오중탑과 천불천탑이 봉안됐다는 게 뼈대다. 감실 불상 도난설은 후대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는 24일 열린 한국고대사탐구학회 발표회에서 이런 내용을 담은 ‘석굴암 천불소탑의 성격과 봉안처 재고’라는 논고를 공개하며 논란에 불을 지폈다.

한 교수는 사라진 불상의 용모나 반출 경위 등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데 주목한다. 오중탑은 1913년 보수 뒤 간행된 일본인들 기록에 양식과 위치가 설명되며, 일본인 자택에 옮겨졌다거나 통감 방문 직후 사라졌다는 등의 반출 경위가 언급된다. 그러나 불상은 야나기 무네요시가 1919년 쓴 석불사 관련 글과 같은해 간행된 <신라구도 경주지> 등에 분실, 반출됐다는 언급만 나올 뿐이다. 총독부가 1938년 펴낸 <불국사와 석굴암>에는 “감실에 창건 당시 무엇이 안치됐는지, 언제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대정 2년(1913) 굴 안에서 2구 석상이 발견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항간의 설은 신빙성이 없다”는 기록까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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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신대 크기에 2톤 가까운 감실 불상은 반출이 쉽지 않다. 한 교수는 “감실이 바닥에서 4m 위에 있고, 1차 보수 전 아치형 천장이 붕괴위험에 처한 상황이었음을 감안하면 불상을 꺼내간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본실 바닥에 두 탑을 봉안할 공간이 마땅치않다는 것도 그렇다. 석굴암 안에 봉안됐던 두 탑의 원 위치는 11면 관음상 앞과 본존상 앞에 각각 배치됐을 것으로 추정해왔다. 그러나 11면 관음상과 본존상의 거리는 1m에 불과해 일찍이 미술사학자 고유섭도 “너무 좁아 궁색한 감이 없지 않다”는 견해를 내놓은 바 있다. 게다가 두 감실은 다른 감실 여덟곳과 얼개가 다르다. 다른 감실은 아래 문수·보현보살 등의 부조상 위에 두른 갑석에 얹혀있으나, 유독 두 감실은 절반은 갑석, 절반은 출입구쪽 튀어나온 부재인 첨차석 위에 얹혀있다. 이런 얼개로는 불상 두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물리학자 남천우의 가설도 나온 바 있어, 두 감실은 다른 감실보다 폭이 훨씬 좁았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한 교수는 탑과 본실 석벽 허리에 새긴 보살, 신장 등 부조상들과의 위계 관계를 토대로 볼 때 격이 높은 탑이 부조상 아래의 바닥에 놓이기엔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천불천탑의 경우 대석까지 합치면 높이는 106~112㎝이며, 빈 감실의 높이가 112~114㎝로, 감실 안에 봉안하는 데 큰 무리는 없다”며 “불상 어깨 위에 탑을 표현하는 당대 인도식 불상의 도상과도 연결된다”고 해석했다. 이에 대해 불교미술사가인 배재호 용인대 교수는 “석굴암의 선례인 돈황의 막고굴 벽화나 석굴 등의 감실에 보살과 탑이 나란히 배치된 경우는 없는 것으로 안다. 당시 동아시아 불교미술양식 측면에서 탑, 보살의 감실 배치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도상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좀더 제시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