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우 ‘땜질’인가?
1997년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58)가 독일 베를린의 옛 박물관 ‘노이에스 뮤지엄’의 복원안(도판)을 내놓았을 때 유럽 건축계는 격렬한 논란에 휩싸였다. 화려하고 장중한 19세기 고전 건축물의 자태를 재현하지 않고, 옛 건물 곳곳의 허물어진 부분들을 그냥 놔두거나, 흰 콘크리트 구조물로 땜질하듯 표나게 복원시키는 구상이 시빗거리가 됐다.
베를린 박물관 섬의 다섯 박물관 중 하나인 노이에스 뮤지엄은 2차대전 때 폭격으로 부서져 60여년간 방치됐던 건물. 치퍼필드는 폐허 같은 건물 내부를 거의 손대지 않았다. 대신 고고학자들이 부서진 옛 도자기 조각들에 진흙을 땜질해 형태를 재현하는 데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총탄 자국 가득한 기둥과 벽의 그을음 자국을 그대로 놔두고 사라진 계단과 통로 등은 흰 콘크리트로 원래 윤곽만 살렸다. 벽·천장은 135만개의 재생 벽돌로 덮었다. 2009년 개관한 뮤지엄은 원래 위용과 전쟁으로 파괴된 폐허의 미학, 21세기 현대건축의 미니멀한 조형미가 공존하는 박물관 섬의 최고 명소로 떠올랐다.
작가는 5일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개막한 작품전 ‘형태 재료’(Form Matters)의 개막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건축가가 옛 건물을 모방해 재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건물이 지닌 복잡 다양한 역사야말로 최고의 건축미다.”
‘형태 재료’전은 아시아에서 처음 선보이는 치퍼필드의 소개전이다. 노이에스 뮤지엄을 비롯해 스페인 발렌시아의 요트경기 조망대인 ‘아메리카 컵 빌딩’, 바르셀로나 ‘정의의 도시’ 등과 같은 걸작 건축물 사진과 모형, 설계안 등으로 이 거장의 25년을 종합한다.
치퍼필드 건축은 격자, 사각형 같은 단순 기하학적 얼개가 되풀이된다. 형태의 파격을 중시하는 21세기 다른 건축거장들과는 한참 다르다.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의 전통에 충실한 그의 건축 공간들은 얼핏 단조롭고 심심해 보이지만, 볼수록 공간감의 깊이를 곱씹게 된다. 기능에 따른 형태에 골몰하지 않고, 건축 안과 바깥의 조화, 삶에 연결된 소박한 형태성 등에서 그는 동서양 건축 사상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생각의 힘을 보여준다. 마천루 건축의 거장 리처드 로저스, 노먼 포스터를 사사했고, 일본 거장 안도 다다오의 기하학적 건축에서 영향을 받은 이력도 무관치 않다. 계곡 대나무 숲과 조화를 이룬 중국 항저우의 저층 아파트촌이나 권위적 대칭 구도 대신 작은 창이 뚫린 건조한 이미지의 정육면체 빌딩 등을 불규칙적으로 놓아 법원 건물들의 엄정한 성격을 강조한 정의의 도시, 뻥 뚫린 전통 마당과 고층 타워가 결합된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 새 사옥 설계안 등에서 웅숭깊은 작가의 개성을 엿보게 된다.
“집합적 사고를 통해 건축 바깥 공간까지 소통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작가는 건축물 안팎의 공간 질서를 강조한 우리 전통궁궐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12일까지, (02)519-0800.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한국건축가협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