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범한 한끼가 특별한 밥상이 되는 순간이 있다. 강퍅한 현실에도 마술 같은 일이 벌어진다. 극강의 식도락 추구에 매몰되지 않은 밥상이 부리는 마술이다. 이 밥상은 힘이 세다. 인간을 바꾸는 밥상의 근원적인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려주기 때문이다. 기실 세상사 모든 일이 밥상에서 출발한다.
지난달 26일 서울 혜화동에 있는 비영리 대안 금융기관 ‘사회연대은행’ 지하. 지글지글 고기 굽는 소리가 천장에 가닿고 있었다. 탁자 위 휴대용 버너에선 돼지고기 항정살이 익어갔다. 돼지기름이 보글보글 소리 내며 춤췄다. 향이 고소했다. “나는 고기 담당”이라는 박태웅 녹서포럼 의장의 손놀림이 재빨랐다. 요즘 찾는 이가 많은 에이아이(AI) 전문가다. 그 옆에서 성공회 사제이자 한국노동재단 이사장인 송경용 신부가 거들었다. 실내 한쪽에 있는 작은 주방엔 김금옥 전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와 엄은희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방문연구원이 매생이에 버무린 굴을 전으로 부쳤다. 여진 ‘공익활동가 사회적협동조합 동행’(이하 동행) 사업처장은 디저트 재료로 쓸 고구마가 잘 익었는지 살폈다. “설거지가 내 일”이라는 송인창 전 국수나무 대표이자 현 레인코리아 대표는 곧 도착할 막걸리를 기다렸다. 이미옥 채식 전문가는 버섯우엉잡채 맛을 봤다. 음식이 익어갈수록 맛난 웃음이 퍼졌다. 이들의 중심에 김대훈 동행 창립 조합원이 있었다. 이구동성으로 그를 “셰프”라고 불렀다. 잠시지만 서양 요리를 배운 이가 그 혼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라자냐 담당이다.


이날 이들이 만든 먹거리는 두부강정, 버섯우엉잡채, 생굴 카르파초, 배추를 곁들인 굴 요리, 매생이굴전, 수비드 항정살, 라자냐, 고구마 아이스크림 등이었다. 이들은 식당도 아닌 데서 왜 음식을 만든 것일까. 더구나 전문 요리사도 아닌데 말이다.
“사회가 좀 더 나아지고 발전하는 데 공익활동가들의 역할과 헌신이 지대한데, 현실에선 인정받지 못하고 고립된 채 고군분투하는 이가 많아 응원해줄 밥상을 차려주고 싶었습니다.” 지난 5일 만난 김대훈 조합원이 이유를 말했다. 공익활동가는 인권, 환경, 노동, 복지, 지역공동체 등 공익 영역에서 활동하는 시민사회 활동가를 말한다. 그는 지난달 26일 차린 밥상을 ‘공익활동가를 응원하는 식탁’(이하 공탁)이라 불렀다. 공탁은 동행의 감초 같은 이벤트다. 공탁의 맛을 제대로 알려면 동행 탄생 역사를 먼저 살펴야 한다.
동행은 2013년 설립됐다.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한 활동가의 죽음이 계기가 됐다. “안타까운 일이 많았는데, 그중 30대 활동가가 심정지로 사망한 일이 있었어요. 아무것도 남긴 거 없이 빚만 있는 그의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는 송 신부와 함께 “지속가능한 활동을 위한 안전망을 공제회 형태”로 구축하기로 했다. 동행의 탄생 배경이다. 의료와 생계 지원, 자금 대출, 치유와 쉼 프로그램 운영 등을 한다. 초창기 10여명이었던 회원 수가 10년이 된 지난해 3천명을 넘었다. 동행은 회비와 후원·기부금 등으로 운영된다. 1인 활동가가 느는 요즘 동행의 역할은 더 커지고 있다.

공탁도 대단할 거 없는 이유로 시작됐다. 2021년 김 조합원은 아이쿱협동조합을 퇴사하고 제주 한달살이를 했다. 스페인 레스토랑 ‘숨골’을 운영하는 고은세 셰프를 만나 사사했다. “복잡하지 않고 기교가 없으면서 소박한 맛”에 매료되면서 음식의 힘을 어렴풋이 느꼈다. 2022년 대선 후 공익활동가들을 폄하하는 논리가 보수 진영을 주축으로 제기됐다. 대중마저 이에 수긍하는 듯했다. “사회적으로 인정 못 받고 자존심 상하는데다 공익활동가들의 활동이 왜곡되는 현실이 속상했습니다. 사기도 저하되고 활동은 위축됐죠. 말랑말랑하면서 사기를 올릴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민했죠.” 송 신부는 김 조합원에게 매달 한명씩 깜짝 파티 식으로 활동가들을 초대해 밥 한끼 대접하자고 제안했다. 이 두 남자는 그해 5월부터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에스엔에스(SNS)를 타고 이들의 밥상 이야기가 퍼졌다. 하나둘 함께하겠다는 이가 늘었다. 지난달 26일 모인 사람들도 그런 이들이다. ‘설거지라도 할게요’ ‘파나 무라도 자를게요’ 등의 댓글이 달렸다.

첫번째 밥상을 받는 이는 ‘생명안전 시민넷’의 박순철씨였다. ‘생명안전 시민넷’은 2017년 설립된 시민단체로 30여년 사회운동을 해온 박씨가 1인 상근자로 활동한다. 세월호, 제주항공 참사 등 각종 사회적 죽음의 피해자들과 함께하는 ‘생명안전 시민넷’은 시민사회 활동 중에서도 “낯설고 소외된 분야”로 여겨졌다. 박씨는 “외롭고 힘들었다”며 “‘바이오 운동이냐, 동물권 운동이냐’란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는 공탁을 받은 그날이 지금도 또렷하다. “(이 일이) 이 사회에서 필요한 부분이라고 해주고 격려해줘서 감동받았죠. 언론이나 학자가 인정해주는 것과 달라요. 같은 활동가가 인정해주는 거잖아요. 이건 가족이 알아주는 것과 같아요. (공탁은 활동의) 존재 필요성을 인정해준 소중한 것입니다.” 박씨는 그날 푸짐한 삼계탕을 음미했다. 평범한 밥상에 힘이 생긴 순간이었다. 박씨뿐만 아니라 청소년 기후 활동가들, 세월호 가족 합창단 지휘자, 한강 샛강 살리기 활동가들 등 수많은 이들이 공탁 자리에 초대됐다. 30회 차려진 공탁은 그동안 100여명 단체까지 포함해 대략 150여명이 거쳐갔다.

“내가 하자고 한 거 하는 사람은 지옥에 안 갑니다.” 송 신부의 너스레로 식사가 시작됐다. “진짜인가요? 신부님” 반문에 모두가 크게 웃었다. ‘사회연대은행’ 김용덕 이사장을 비롯해 활동가 10여명이 식탁에 앉았다. 동행 이사장인 박래군 인권운동가도 뒤늦게 도착했다. “(공익)활동가들이 공익을 위해 일하느라 자신을 돌볼 시간이 없습니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차려주는, 누군가로부터 인정받는 밥상을 받는 것에 감동합니다. 이것(공탁)으로 혼자 (활동)하는 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함께한다는 거를 느끼게 됩니다.” 송 신부의 말에 식탁은 한순간 숙연해졌다. 이미옥씨는 “음식을 매개로 살아가는 얘기 나누고 정성 어린 음식으로 차린 공탁이 지지와 격려, 그런 얘기를 끌어내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6년째 채식 연구하며 때로 이웃과 ‘소셜 테이블’을 나누는 그는 기후와 음식 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공정무역 활동가로도 8년간 활동했다.



이날 이들이 차린 밥상은 맛은 있었을까. 제아무리 의미가 깊고 정성이 담겨도 맛이 없으면 숟가락이 잘 가질 않는다. “점심도 소식하고 이 시간을 기다렸어요. 너무 맛있어서 배 터지게 먹었어요. 요리 못하는 1인 가구라 더 좋네요.” 37살 활동가 김가희씨가 맛 평가를 했다. 동료인 27살 활동가 이지민씨는 “쟁쟁한 메뉴가 많았지만 두부강정이 가장 맛있다”며 이 메뉴들을 집에서 만들어볼 생각이라고 했다.
이날은 최루탄보다 더 매운 한파가 몰아친 날이었다. 밖이 추울수록 밥상 온기는 올라갔다. 서로를 향한 눈빛과 웃음, 격려가 땔감이 됐다. 공탁이 부린 마술이다. 합창이 공탁 위에 퍼졌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해 떨어져 어두운 길을/ 서로 일으켜주고/…/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글∙사진 박미향 선임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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