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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생각

스토리만으론 결코 알 수 없는 디테일의 아름다움

등록 :2021-06-11 04:59수정 :2021-06-11 10:38

[책&생각] 정여울의 문학이 필요한 시간
(32) ‘당신 인생의 이야기’, 그다음이 궁금한 이야기를 향한 끝없는 갈망
아픈 결말까지 알지만 지금 기쁘게 사랑해야 할 이유
내 마음 두드려 살 용기 준, 이야기의 살아있는 힘
테드 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각색한 영화 <컨택트>의 포스터.
테드 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각색한 영화 <컨택트>의 포스터.

“그래서, 그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데?” “그래서 둘이 사랑에 빠진다는 거야, 아님 결국 헤어진다는 거야?” 아직 알지 못하는 영화나 책의 스토리를 미리 알고 싶은 마음에, 사람들은 조급하게 질문을 한다. 그다음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냐고. “미리 알면 재미없지.” 사람들은 스토리를 알면 재미없다며 ‘스포일러’를 극도로 경계한다. 반면 어떤 이들은 느긋한 표정으로 말한다. “스토리보다는 디테일이지!” “스토리를 다 알아도, 보고 또 봐도 아름다운 작품이 있어.” “스토리는 작품의 아주 작은 일부야. 결코 줄거리로는 요약되지 않는 섬세한 디테일 때문에, 다시 그 작품을 보고 싶어져.” 나 또한 그렇다. 스토리를 다 알아도 여전히 아름다운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들은 뜻밖의 반전이나 스릴과 서스펜스가 없더라도, 보고 또 보고 싶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해진다. 만일 내 삶의 줄거리를 모조리 안다 해도, 내 죽음의 정확한 시간과 장면까지 미리 다 안다 해도, 다시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똑같이 반복할 수 있을까. 당신이 언제 어디서 고통스럽게 죽게 될지 미리 안다 해도,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어느 날 내가 끔찍한 사고로 죽는 모습을 미리 본다 해도, 다시 세상에 태어나기를 바라게 될까.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지독히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우린 처음부터 인생을 똑같이 살아내고 싶을까.

그 자체로 선물이었던 외계인의 언어

테드 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반복할 거야’라고 대답하는 이야기다. 영화 <컨택트>(원제: Arrival)로 리메이크된 이 소설은 어느 날 갑자기 지구 곳곳에 나타난 외계생명체가 보내는 암호를 해독하는 언어학자의 이야기다.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신비로운 신호들만 보내는 외계생명체들을 바라보면서, 루이즈는 그들의 목표가 지구침공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것은 언어학자가 아니어도, 조금만 마음을 열어 외계생명체의 몸짓을 관찰하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물리학자 게리와 언어학자 루이즈는 외계생명체에 대한 분석을 위해 만난다. 물리학자는 언어학자의 감성을 이해하기 위해, 언어학자는 물리학자의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 외계인은 지구인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분투하며, 그들은 서로에게 점점 빠져든다.

물리학자 게리는 외계인을 ‘헵타포드’(7을 뜻하는 hepta와 발을 뜻하는 pod를 합친 조어)라 불렀다. 외계인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외계어를 가르쳐준다. 외계인들은 한없이 뭔가를 퍼주려 하는데, 지구인들이 그것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다. 외계인들은 그저 한없이 베풀어주기 위해 왔는데, 지구인들은 첨단기술이나 무기나 에너지자원 같은 것만 기대하기에 그들의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 바로 언어 자체라는 것을 모른다. 오직 언어학자 루이즈만이 외계인의 언어 자체가 인류에게 위대한 선물임을 깨닫는다. 헵타포드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임으로써 루이즈는 과거-현재-미래와 논리적 인과관계로 사유하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마침내 시간을 총체적이고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힘을 갖게 된다. 선물을 주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선물을 받는 능력 또한 끝없이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루이즈는 외계인으로부터 무기나 첨단기술을 습득하기를 원치 않았고 오직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했기에 ‘반은 헵타포드, 반은 인류’로 살아가는 놀라운 생존능력을 터득한 것이다.
테드 창의 소설 &lt;당신 인생의 이야기&gt;를 각색한 영화 &lt;컨택트&gt;의 한 장면. 주인공 루이즈가 외계인의 우주선 앞을 지나며 생각에 잠긴 모습.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테드 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각색한 영화 <컨택트>의 한 장면. 주인공 루이즈가 외계인의 우주선 앞을 지나며 생각에 잠긴 모습.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확실한 이득을 얻지 못하면 반드시 손해일 것이라고 믿는 지구인의 자본주의적 계산법으로는 외계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지구인과 외계인의 새로운 관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단어는 바로 ‘논제로섬 게임’(non-zero-sum game)이다. 나와 타인의 관계가 적대적일 필요는 없다는 것. 그들의 이익이 곧 우리의 손실인 관계가 아니라, 우리 모두 궁극의 승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개념이 바로 논제로섬 게임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나보다 뛰어난 타인을 질투하거나 증오하지 않고 진정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내가 이기기 위해 당신을 짓밟지 않아도 되는 게임, 내가 살아남기 위해 당신을 없애지 않아도 되는 이 게임 속에서는 모두가 승자이며, 승자와 패자 자체가 사라져 서로가 행복해지는 진정한 소통의 게임이다. 돌이켜보니 아름다운 문학작품 속의 모든 감동적인 언어는 바로 논제로섬 게임을 지향한다. <소나기>에서 소녀에게 예쁜 꽃만을 골라 주기 위해 시든 꽃을 솎아내어 버리려 하는 소년. 그 소년에게 소녀는 말한다. 하나도 버리지 말아라. 모두가 아름답고 모두가 소중함을 아는 이 해맑은 소녀야말로 시든 꽃의 아름다움조차 사랑할 줄 아는 지혜의 메신저, 논제로섬 게임의 눈부신 화신이 아닐까.

줄거리 알아도 매번 새로운 울림

루이즈는 헵타포드처럼 생각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지구인과 전혀 다른 시간의식을 획득한다. 관계를 시작할 때 관계의 종말마저 미리 보게 된 것이다. 게리와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 루이즈는 게리와 언젠가 이혼하게 될 것임을, 게다가 루이즈와 게리가 키우게 될 딸이 꽃다운 나이에 비참하게 죽을 것임을 미리 알게 된다. 하지만 루이즈는 사랑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게리가 이렇게 속삭이는 순간, 루이즈에게는 다른 선택을 감행할 기회가 주어진다. “아이를 가지고 싶어?” 그러자 루이즈는 미소 지으며 “응”이라고 대답한다. 뼈아픈 결말을 다 알면서도, 기쁘게 다시 사랑할 것을 맹세하는 것이다. 게리와 키스하고 포옹하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딸의 미래까지 떠올리는 루이즈의 얼굴에는 어떤 후회도 두려움도 깃들지 않는다. 슬픔보다 사랑이 더 크기 때문이다. 미래의 공포보다 현재의 사랑이 더 크기 때문이다. 언젠가 방부제 냄새로 가득한 차디찬 시체안치소에서 직원이 시트를 걷으며 ‘이 시체가 당신의 딸이 맞습니까’라고 묻는다 해도, 루이즈는 그 딸을 낳을 것이다. 다시 딸을 낳고, 수없이 상처받아 피눈물을 흘릴지라도, 온 힘을 다해 딸을 사랑할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을 알면서도, 다시 그 시간을 속속들이 일분일초도 빠짐없이 살아낼 것이다.

줄거리를 다 알지만 다시 읽을 때마다 전에 없던 새로운 울림을 주는 인류의 원초적 문학, 그것은 바로 신화다. 얼마 전에는 프시케와 에로스의 사랑 이야기를 다시 읽다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스로마신화를 읽다가 문득 울컥하는 무엇이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인간의 아름다움보다는 신들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그리스로마신화에서, 딱 한번 인간이 신을 뛰어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인간으로 태어난 프시케가 신과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장면이다. 에로스가 ‘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토라져 프시케의 실수, 즉 잠든 에로스의 얼굴을 훔쳐본 것을 용서하지 못하고 신들의 세계로 도망쳐버린 뒤. 프시케는 에로스의 사랑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다. 이렇게 용감한 프시케에게도 절망을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있었다. 죽음의 저편, 하데스로 가서 페르세포네가 지닌 미의 상자를 가지고 와야 하는 순간이었다. 하데스로 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니, 이제 죽음밖에는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프시케는 눈 딱 감고 절벽 아래로 추락하기로 결심한다. 프시케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려 할 때, 어디선가 형체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가련한 소녀야, 왜 그런 무서운 방법으로 최후를 맞이하려 하는가? 지금까지 수없이 신들의 보살핌을 받은 그대가 이제는 두려움에 빠져버렸구나.”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내가 그저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이 목소리가 직접 울려 퍼지는 듯 생생한 현실감을 느꼈다. 그건 아마도 신화를 통해 생의 아름다움을 전하려 했던 이야기꾼의 목소리가 수천년의 간극을 뛰어넘어 나에게 도달하는 순간의 감동이 아니었을까.

이야기가 전해주는 구원의 목소리

‘왜 그렇게 무서운 방법으로 최후를 맞이하려 하는가’라는 목소리는 마치 오래전 내가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었을 때, 내가 누군가로부터 그토록 듣고 싶어 하던 구원의 목소리 같았다. 왜 그렇게 무서운 방법으로 많은 것을 포기하고 싶어 했을까. 불가능해 보이는 모든 미션에 도전할 때, 우리는 저마다 신화 속의 프시케가 된다. 신화가 내게 말을 거는 순간, 그 순간은 내가 가장 많이 상처받았을 때였고, 그리하여 내 마음이 가장 많이 열려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분노에 사로잡히거나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때마다, 내 안에서 속삭이는 보이지 않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가엾은 친구야, 왜 그토록 무서운 방법으로 세상을 버리려 하니. 나는 그 목소리가 지상을 떠나고 싶어 하는 모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끝내 가닿았으면 좋겠다. 신화, 이야기, 즉 문학이 내게 선물한 것은 끝내 다시 이 세상을 살아갈 용기,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을 용기였기에. 그렇게 문학은 내 심장에 노크한다. 다시 일어서라고. 다시 사랑하라고. 다시 그 모든 장애물과 싸워 이기라고. 나에게 감동을 준 그 모든 뜨거운 이야기들은 절망에 빠진 순간 오히려 더 커다란 힘을 발휘하며 속삭인다. 벗에게 배신당해도 부디 벗을 보살피라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해도 더 나은 삶을 향한 도전을 멈추지 말라고. 모두가 너를 비웃어도 네 꿈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라고. 네가 세상을 향하여 쏟은 사랑을 절대 돌려받지 못하더라도, 결코 네 안의 더 크고 깊은 사랑을 포기하지 말라고.

추신. 지금까지 ‘문학이 필요한 시간’과 함께해주신 한겨레 독자 여러분들께, 깊고 따스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더욱 새로워진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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