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책&생각

“내 음악은 죽은 자들을 위한 묘비명”

등록 :2018-05-03 20:07수정 :2018-05-04 11:40

러시아 작곡가 쇼스타코비치 전기
2차 대전, 독일 포위 속에 작곡된
교향곡 7번 연주·배포 집중 조명
‘스탈린 폭정에 어떻게 살아남았나’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쇼스타코비치와 레닌그라드 전투
M. T. 앤더슨 지음, 장호연 옮김/돌베개·2만2000원

1942년 8월9일 저녁, 러시아 레닌그라드의 필하모니아 홀에 청중이 물 밀듯 모여들었다. “도시의 예술계 사람들과 공산당 엘리트들만이 아니었다. 곡을 듣기 위해 먹을 것을 포기하고 버틴 수백명의 사람들도 연주회장을 찾았다. 제복 차림으로 전선에서 곧장 온 군인들도 있었다. 몇몇은 자동화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굶주리고 지쳤으나 얼굴엔 저마다 야릇한 기대와 흥분이 넘치는 표정들이었다.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공연 준비를 하는 동안, 멀리서는 붉은 군대가 연주회장으로부터 적들의 시선을 돌리려고 3000여발의 고성능 포탄을 적진에 퍼부었다.

이 기묘한 풍경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군의 포위로 1년째 완전히 봉쇄된 도시 레닌그라드에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가 초연되던 날 벌어졌다. 연주는 공연장 밖에서도 확성기를 통해 거리와 운하 너머로까지 울려 퍼졌다. “붉은 군대는 음악이 독일 병사들이 참호와 포 진지에 웅크려앉은 적진에까지 들리도록 스피커를 설치해놓았다. 레닌 그라드 전체가 그날 밤 음악을 들었다.”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은 부제 그대로 ‘쇼스타코비치와 레닌그라드 전투’에 관한 책이다. 러시아가 낳은 20세기 최고 작곡가로 꼽히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의 파란만장한 삶과 동시대인들이 헤쳐 나가야 했던 격량의 역사를 그의 일곱번째 교향곡 ‘레닌그라드’에 얽힌 일화를 중심으로 박진감 넘치게 재구성한 논픽션 문학이다. 본문만 500쪽 분량이지만 긴박한 사건과 드라마틱한 서술 덕에 지루할 틈이 없다.

산책하고 있는 말년의 쇼스타코비치. 그는 모두 15곡의 교향곡과 15곡의 현악4중주를 작곡했다. 돌베개 제공
산책하고 있는 말년의 쇼스타코비치. 그는 모두 15곡의 교향곡과 15곡의 현악4중주를 작곡했다. 돌베개 제공

1925년 19살 무렵의 쇼스타코비치.  위키피디아
1925년 19살 무렵의 쇼스타코비치. 위키피디아

국내에 쇼스타코비치의 생애와 작품을 함께 조명한 책이 나온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최근작으로는 영국 작가 줄리안 반스가 쓴 장편 소설 <시대의 소음>(2006)의 번역판이 지난해 출간됐다. 가족을 지키려 적당히 타협하면서도 예술적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 강인함에 방점을 찍어 묘사했다. 앞서 러시아 출신의 음악학자이자 저널리스트로 1976년 미국으로 이주한 솔로몬 볼코프가 쇼스타코비치의 구술을 정리한 회고록 <증언>(1979)이 2001년 우리말 번역본(이론과실천)으로 나온 바 있으나 지금은 절판됐다. 2014년에 나온 <쇼스타코비치, 그 삶과 음악>은 주요 곡들의 해설 중심으로 작품의 배경과 관련 에피소드를 곁들인 영어판의 번역본으로, 184쪽 분량이어서 쇼스타코비치의 파란만장한 삶 전체를 자세히 담아내기엔 많이 부족하다.

쇼스타코비치는 생전에 교향곡만도 모두 15곡을 작곡했다. 그 중에서도 교향곡 7번은 작곡 배경, 초연 환경, 서방에 전달되는 과정, 곡의 연주가 지닌 의미 등 여러가지로 극적인 서사를 함축하고 있는 작품이다. 1941년 6월, 나치 독일은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한 데 이어 9월부터는 레닌그라드를 점령하기 위한 포위작전을 펼쳤다. 쇼스타코비치의 가족도 덫에 걸려들었다. 1944년 1월까지 장장 872일이나 지속된 역사상 최장기 포위전으로 무려 3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초토화된 레닌그라드의 시민들을 고무하고 추모하고 단결시키는 교향곡을 쓰기 시작했다. 이 곡에 ‘레닌그라드’라는 작품명이 붙은 이유다.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사방이 전쟁이었다. 나는 인민들과 함께 있어야 했고, 궁지에 몰린 조국의 이미지를 만들어서 음악에 새기고 싶었다.”(회고록 <증언>중에서.)

1941년 소련을 침공한 독일 공군이 레닌그라드를 폭격하자 시민들이 대피하고 있는 모습. 돌베개 제공
1941년 소련을 침공한 독일 공군이 레닌그라드를 폭격하자 시민들이 대피하고 있는 모습. 돌베개 제공

독일군에 포위된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난방에 필요한 나무를 아끼려 사망자를 위한 관을 만드는 대신 흰 천으로 감싸 묶었다.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탈진으로 쓰러져 숨져갔으나 달리 방법이 없어 방치됐다.돌베개 제공
독일군에 포위된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난방에 필요한 나무를 아끼려 사망자를 위한 관을 만드는 대신 흰 천으로 감싸 묶었다.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탈진으로 쓰러져 숨져갔으나 달리 방법이 없어 방치됐다.돌베개 제공

쇼스타코비치가 곡을 쓴다는 사실 자체가 러시아엔 빅뉴스였고 희망이었다. 소련 당국은 쇼스타코비치를 라디오방송에 출연시켜 육성으로 그 사실을 발표하게 했다. 가장 비인간적이고 참혹한 죽음의 전장에서 가장 웅장하고 격정적인 음악이 탄생한 것은 역설적이다. 이 곡의 악보가 길이 30미터 분량의 마이크로필름에 담겨 독일의 포위망을 뚫고 중동과 북아프리카 사막을 넘어 서방으로 넘겨져서 연주되는 과정도 첩보영화를 방불케 한다. 독일에 맞선 서방연합국도 교향곡 7번에 열광했다. 1942년 여름 영국 런던과 미국 뉴욕에서도 연주돼 극찬을 받았으며, 독일의 맹공에 한때 사기가 꺾였던 연합군의 동맹을 강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 작품의 탄생 배경을 둘러싼 의문과 논란도 있다. 1970년대 냉전 시절에 조국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볼코프가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에 쓴 구절은 이렇다. “나는 이 주제를 작곡할 때 인간성을 위협하는 또다른 적들을 생각하고 있었다…히틀러가 범죄자임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것은 스탈린도 마찬가지다. 나는 7번 교향곡을 ‘레닌그라드 교향곡’이라고 부르는 것에 불만이 없지만, 포위된 레닌그라드를 그린 게 아니다. 스탈린이 파괴했고 히틀러는 그저 마무리만 했을 뿐인 레닌그라드에 관한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1906년 9월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던 페테르부르크의 중산층 가정에서 3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문화예술도시이자 공업도시인 페테르부르크는 한때 정통 러시아식 명칭인 페트로그라드(1914~1924년) 또는 레닌그라드(1924~1991년)로 불리기도 했을 만큼 러시아 정치와 역사에서 중요하고 의미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쇼스타코비치의 생애는 인류사를 통틀어 가장 격동의 시대였던 20세기 한가운데를 관통한다. 그가 태어나기 바로 1년 전, 다수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며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있던 겨울궁전으로 노동권 탄원 행진에 나섰다. 엄청난 군중이 모여드는 것에 겁 먹은 카자크 근위병들이 총칼로 무력진압에 나서면서 수백명이 숨지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른바 ‘피의 일요일’ 사건이었다. “눈 위에 엉킨 핏덩이는 혁명의 씨앗을 잉태했다.” 쇼스타코비치의 운명적 삶의 방향도 이때 정해진 것일까?

레닌그라드에서 어린 스카우트 대원들을 대상으로 독가스 공격에 대비하는 훈련을 하고 나서 공연한 야외극.
레닌그라드에서 어린 스카우트 대원들을 대상으로 독가스 공격에 대비하는 훈련을 하고 나서 공연한 야외극.

1942년의 혹독한 겨울이 끝나자 레닌그라드 시민들이 나와서 포위된 도시의 거리를 치우고 있다. 돌베개 제공
1942년의 혹독한 겨울이 끝나자 레닌그라드 시민들이 나와서 포위된 도시의 거리를 치우고 있다. 돌베개 제공

쇼스타코비치의 주변 사람들은 어렸을 적 그를 “몽상적”이며 “수줍음이 많”았으나 “친절하고 쾌활한” 아이로 기억한다. 가정교사에게서 피아노와 댄스를 배웠다. 부모를 따라 오페라를 본 다음날 “아직 악보를 읽을 줄 몰랐던 아이는 오페라를 완벽하게 기억했고 거의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불렀”을 만큼 음악에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그가 열한살이 되던 1917년 2월과 10월, 러시아혁명이 일어났다. 제정 러시아 시대가 막을 내리고 소비에트 공화국 시대를 열렸다. 그 진원지인 페테르부르크에서 쇼스타코비치도 혁명의 흥분을 목격했다. 그해 3월 혁명 희생자들을 위한 장례행렬을 보고 온 그는 조용히 피아노를 쳤다. <혁명의 희생자들에게 바치는 장송행진곡>이 건반 위에서 작곡됐다.

그는 열세살이 되던 1919년 음악원에 들어가 본격 음악수업을 시작했다. 혁명에 이은 내전으로 모든 게 열악했지만 쇼스타코비치는 친구들과 함께 얼어붙은 도시 곳곳을 누비며 공연을 들었고 피아노를 치며 독학으로 작곡을 배웠다. 혁명의 열정적 기운은 예술에도 흘러넘쳤다. 그러나 학창시절 쇼스타코비치는 정치엔 별 관심이 없었다. 언젠가 ‘마르크스주의 방법론’ 과목 시험에서 시험관이 “(19세기 작곡가인) 쇼팽과 리스트의 차이점을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설명하라”고 하자 쇼스타코비치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가 혼쭐이 났다고 한다.

1941년 7월 레닌그라드 음악원 옥상에서 소방대원으로 근무하던 시절 쇼스타코비치. 돌베개 제공
1941년 7월 레닌그라드 음악원 옥상에서 소방대원으로 근무하던 시절 쇼스타코비치. 돌베개 제공

1924년 레닌이 죽고 나자, 그가 가장 불신했던 인물인 스탈린이 권력을 승계했다. 이때만 해도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 체제에서 자신이 치러야 할 고난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1926년 5월12일은 쇼스타코비치가 ‘제2의 탄생’이라고 부르며 자축했던 날이다. 자신의 교향곡 1번이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에 의해 초연된 날이었다. 그의 나이 열아홉살 때였다. 첫 교향곡의 참신한 선율에 청중은 환호했고, 서방의 유명 오케스트라들도 잇따라 무대에 올렸다. 이듬해, 10월혁명 10주년을 맞아 작곡한 교향곡 2번엔 악보 맨 앞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문구가 적혔다. 쇼스타코비치는 그 뒤로도 수많은 교향곡과 협주곡, 오페라곡을 쏟아냈다.

그러나 스탈린 독재와 경직된 이념사회는 천재 작가의 예술혼을 옥죄었다. 재앙은 1936년 쇼스타코비치가 모스크바로 연주여을 갔을 때 시작됐다. 자신의 오페라곡 <맥베스 부인>이 공연되던 볼쇼이 극장으로 스탈린이 관람을 왔다가 공연중 자리를 박차고 나가며 말했다. “이것은 음악이 아니라 혼란이오.” 다음날,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실린 기사는 더 끔찍했다. “조잡하고 원시적이고 저속하며…부르주아적이고… 짐승 같다.” 쇼스타코비치는 순식간에 “국보급 작곡가”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모르는 “반인민 형식주의자’로 전락했으며, 비밀경찰의 감시 대상이 됐다. 왜 그랬을까? 지은이의 추론은 이렇다. “쇼스타코비치의 세계적 명성이 스탈린의 심기를 불편하게,(…) 오페라에 묘사된 성적 분출에 스탈린이 혐오를 느꼈을 수도,(…) 쇼스타코비치를 본보기 삼아 ‘진정한 예술·문학’에서 멀어져가는 소비에트 연방의 문화 지도자들 전체를 꾸짖고 괴롭히려 한 것 같다.”

1942년 8월9일, 나치에 포위된 지 1년을 앞둔 레닌그라드의 필하모니아 홀에서 지치고 굶주린 레닌드라드 라디오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이 연주되고 있다. 이날 공연은 거리의 확성기를 통해 도시 전체로 울려퍼졌으며, 도시를 포위한 독일군 병사들의 귀에까지 들렸다.
1942년 8월9일, 나치에 포위된 지 1년을 앞둔 레닌그라드의 필하모니아 홀에서 지치고 굶주린 레닌드라드 라디오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이 연주되고 있다. 이날 공연은 거리의 확성기를 통해 도시 전체로 울려퍼졌으며, 도시를 포위한 독일군 병사들의 귀에까지 들렸다.

스탈린 체제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자살 직전까지 내몰린 공개 비판과 숙청의 위협 속에서 비굴함을 강요받기도 했다. 그런 속에서 그는 살아남았고, 비밀경찰 악단을 위한 춤곡을 쓰기도 했다. 후대 호사가들은 이를 두고 그가 스탈린주의자였는지 반체제 인사였는지 따지기도 한다. 지은이는 “실제로 그는 반항과 순응이 뒤섞인 인물이었다”며 지휘자 쿠르트 잔덜링의 말을 전한다. “그도 인간일 뿐이었어요. 자신의 문제일 때는 겁쟁이였지만 다른 사람이 관계되는 일에는 무척 용감하게 나섰습니다.”

쇼스타코비치가 심장질환으로 숨을 거두기 직전에 남겼다는 말은 이렇다. “내 교향곡은 대부분 묘비다. 너무도 많은 우리 인민들이 죽었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혔다. 내 친구들도 그런 일을 당했다. 그들의 묘비를 어디에 세우겠는가? 오직 음악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진실을 후원해주세요
용기를 가지고 끈질기게 기사를 쓰겠습니다.
여러분의 후원이 우리 사회에 드리운 어둠을 거둡니다.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남궁민, 모델 진아름과 내달 7일 결혼한다 1.

남궁민, 모델 진아름과 내달 7일 결혼한다

윤 대통령 떳떳하다면 ‘비속어 논란’에 왜 성낼까 2.

윤 대통령 떳떳하다면 ‘비속어 논란’에 왜 성낼까

파가니니도 환호할 거야, 블랙핑크 ‘셧다운’ 듣는다면 3.

파가니니도 환호할 거야, 블랙핑크 ‘셧다운’ 듣는다면

‘수리남’ 국경 총격전은 어딜까? ①브라질 ②제주 ③하와이 ④수리남 4.

‘수리남’ 국경 총격전은 어딜까? ①브라질 ②제주 ③하와이 ④수리남

‘우영우’ 박은빈, 미 크리틱스초이스 행사서 ‘라이징 스타’상 5.

‘우영우’ 박은빈, 미 크리틱스초이스 행사서 ‘라이징 스타’상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Weconomy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한겨레 데이터베이스 | 뉴스그래픽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탐사보도 | 서울&
스페셜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사업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