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타파를 부르짖지 않은 역대 정부는 없었다. 박근혜 정부도 예외가 아니다. 집권 초기인 2013년 ‘학벌이 아닌 능력중심사회를 위한 국가역량체계 구축’을 내걸었다. 87년 민주화 이후 역대 정부에서 학벌타파는 늘 정책 순위표의 상단에 적혀 있었다. 최근 20년 내 대통령 두 사람의 최종 학력이 고졸이었으니 그 의지와 강도를 짐작할 법도 하다.
그런데 지표들을 보면 영 딴판이다. 2016년 10월 기준 ‘고위공무원단’ 1411명 중 이른바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은 780명으로 전체의 55.2%(서울대 33.7%)나 된다. 2013년 48.0%에서 오히려 늘었다. 대법원이 올해 신규 임용한 경력법관 가운데 84%, 20대 지역구 국회의원 253명 가운데 48.2%(122명)가 이 3개 대학 학부 출신자들이다. 또 500대 기업 최고경영자의 절반이 이 3개 대학을 나왔고(2015년), 4년제 이상 대학 총장의 30% 이상이 서울대 졸업자다(2009년 기준). 그렇게 오랜 기간, 역대 모든 정부가 밀어붙인 학벌타파 정책이 실은 헛수고에 불과했다는 뜻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박남기 교수(광주교대)는 여러 정권이 극단적 실력주의의 병폐를 학력(學歷)주의의 폐해로 오진하면서 처방을 잘못했고, 그 결과가 누적되면서 우리 사회가 ‘신세습사회’로 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박 교수는 지난달 28일 ‘교육불평등’을 주제로 열린 서울시교육청 주최 ‘2016 서울국제교육포럼’에서 발표한 논문 ‘학벌타파 노력이 실패하는 이유’에서 역대 정부의 학벌타파 정책, 올초 조용히 해체된 시민단체 ‘학벌없는사회’의 20년 가까운 캠페인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 원인(遠因)을 미국 학자 콜린스의 ‘학력주의 사회’(credential society)에 대한 오독에서 찾았다.
박 교수에 따르면 우리 지식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콜린스의 ‘학력주의사회론’(credentialism)은 ‘실력주의사회론’(meritocracy)과 달리 사회적 지위와 재화의 배분 기준이 실력과는 무관한 ‘학교졸업장’(credential)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이 이론의 배경이 된 미국 사회에선 실제로 부모가 돈이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으면 그 자녀들이 명문 사립학교를 거쳐 명문 사립대학으로 진학하는 길이 활짝 열려 있고, 그런 사례가 무수히 많다.
“미국처럼 부모의 배경에만 의존해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면 대학 졸업장과 실력이 일치하지 않는 비율이 상당히 높게 되어 ‘학력주의 사회’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지위 배분은 애초부터 학력이 아니라 객관적 시험을 통해 이뤄지는 ‘실력주의’ 요소가 강했다. 특정 대학 출신들이 사시·외시·행시 등에서 다수의 합격자를 내고, 대기업 입사자 중에서도 높은 비율을 차지한 것은 부모의 배경을 등에 업은 ‘학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력’으로 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실력 위주의 대입 제도가 유능한 학생들의 특정 대학 집중현상을 낳고, 그 특정 대학 출신들이 졸업 후 좋은 직업을 독과점하고, 그들이 다시 ‘모교 후배’를 끌어주면서 학벌, 즉 ‘파벌 학벌’이 재생산되는 악순환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과도한 경쟁, 교육전쟁, 학벌, 사회 양극화 등은 실력주의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역으로 과도한 실력주의가 가져온 폐해다.”
‘지위 학벌’이 문제인 미국과는 원인이 판이하니 처방도 달라야만 했다. “파벌 학벌을 타파하기 위해선 학력을 기준으로 역차별을 해야 했다.” 신규 채용 때 ‘SKY’ 같은 특정대학군 졸업자 비율의 상한선 설정, 이른바 명문대의 신입생 정원 대폭 축소, 관계·기업 등의 승진 심사 때 객관성 확보와 특정대학군 승진비율 상한제 등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역대 모든 정부는 거꾸로 갔다. 애초 우리나라에 없던 미국식 학력주의 요소를 잇따라 도입했다. 대학 입학 전형의 다양화·입학사정관제 도입으로 “부모의 직접적 영향력이 점점 더 크게 작용할” 여지를 넓혀줬다. 가령 최순실씨 딸은 그런 제도 변화의 ‘수혜자’일 수 있다. ‘현대판 음서제’로 비판받는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과 치의학전문대학원·약학전문대학원 등 부모의 부를 필요로 하는 전문대학원제 도입, 부모의 ‘배경’이 없어도 오직 실력으로 경쟁할 수 있던 사법시험·외무고시의 폐지, 행정고시 비중 축소와 인턴제 도입 등은 모두 애초 의도와 달리 “(부모 직업의) 세습 경향을 강화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박 교수는 그 배경에 단순한 ‘오진’ 이상의 음습한 저의, 즉 “학벌타파를 주장하면서 그 안에서 신세습사회를 구축해가고자 하는 (기득권 계층의) 숨져진 의도”를 의심한다.
“지금과 같은 보완책은 A가 누리던 혜택을 B가 누리도록 대상을 바꿀 뿐 그 결과로 보다 공평하고 행복한 세상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집단적 미망부터 떨쳐야 한다니, 갈 길이 아득하다.
강희철 기자 hck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