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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생각

오래, 그냥

등록 :2016-10-22 00:19수정 :2016-10-22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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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택광의 시
버스는 두 시 반에 떠났다
버스는 두 시 반에 떠났다
-도요에서 / 최영철

하루 예닐곱 번 들어오는 버스에서 아저씨 혼자 내린다
어디 갔다 오는교 물으니 그냥 시내까지 갔다 왔단다
그냥 하는 게 좋다 고갯마루까지 가 보는 거
누가 오나 안 오나 살피는 거 말고 먹은 거 소화시키는 거 말고
강물이 좀 불었나 건너마을 소들은 잘 있나 궁금한 거 말고
그냥 나갔다 오는 거 주머니 손 찔러넣고 건들건들
한나절 더 걸리든 말든 그냥 나갔다 오는 거
아저씨는 그냥 나갔다 온 게 기분 좋은지
휘파람 불며 그냥 집으로 가고
오랜만에 손님을 종점까지 태우고 온 버스는
쪼그리고 앉아 맛있게 담배 피고 있다
그냥 한번 들어와 봤다는 듯
바퀴들은 기지개도 켜지 않고 빈차로 출발했다
어디서 왔는지 아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새끼를
일곱이나 낳은 발발이 암캐와
고향 같은 건 곧 까먹고 말 아이 둘을 대처로 떠나보낸 나는
멀어져가는 버스 뒤꽁무니를 바라보았다
먼지를 덮어쓴 채 한참

“때로 우둔이 길 없는 길을 오래가게 한다”고 시인은 시집 서문을 갈음했다. 식상한 듯하지만, 요즘 시절을 꿰뚫는 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는 ‘우둔’이라기보다 ‘오래’일 것이다. 무엇이든 지속하기 어려워진 시대에 시인은 오래갈 것을 주문한다. 역설적으로 그 오래가는 것이야말로 ‘우둔’인 것이다. 오래가는 이라면 개의치 않을 문제이지만, 다른 이들에게 무엇인가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는 고집은 ‘우둔’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오래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시인은 슬쩍 그 ‘비결’을 흘려준다. “그냥 하는 게 좋다”고 말이다. 목적 없이 그냥 하는 것, 다시 말해서 목적 없음이라는 목적. 이 오래된 격언이 시인의 생활을 통해 다시 살아난다. 홀로 버스를 타고 그냥 시내에 갔다 오는 한가한 마음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항상 우리는 목적에 시달리고, 무엇인가 달성해야 한다는 닦달에 들들 볶인다.

이제는 마음의 위안조차도 ‘힐링’이라는 고상한 마사지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중한 자기를 방치하는 나태하고 무책임한 인간으로 비친다. 무엇인가 열성을 다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이 빠져 있는 느낌이다. 그렇게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우리는 다음 차례를 향해 달려간다. 그래서 시인은 마음 편하게 목적을 버리자고 말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 시가 드러내는 심사는 그렇게 편안하지 않다.

분명 시인은 불편하다. 도시를 비껴난 ‘도요’에서 시인은 시내로 다시 떠나는 버스를 본다. 고향을 벗어나 도시에 살고 있는 아이 둘도 생각한다. 시인 자신도 도시에 살다가 ‘도요’로 이주한 외지인이다. ‘도요’는 이미 피난처가 아니다. 모든 위계와 질서가 사라진 무위의 공간이다. 이 마을의 주민은 중심을 벗어난 주변에서 그냥 살고 있을 뿐이다. 휴일에 잠깐 놀러온 도시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이들이다. 시인의 눈은 이런 삶의 의미를 무심하지만 예리하게 읽어내고 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시인은 그럼에도 “그냥 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멀어져 가는 버스 뒤꽁무니를 먹먹하게 쳐다보고 있는 시인의 모습은 초탈하다기보다 어쩔 수 없는 곤혹을 감당하는 위인에 가깝다. 미련이 남은 삶이기에 시인은 남아 있는 나날을 지탱해야 할 것이다. 얼마 전까지 도시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목적에 매여 아등바등 살아왔던 시인에게 ‘도요’에 사는 ‘아저씨’처럼 그냥 시내에 나갔다 오는 삶은 여전히 낯선 것일지도 모른다.

삶을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변두리에 산다고 삶이 한가할 리는 없다. 지구상 어디든 장소성을 떠나 삶의 목적을 목적 없음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시인은 이 비결을 일러주는 것 같다. 이런 삶에서 ‘아비’나 ‘고향’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목적 없는 삶은 결과적으로 지금 눈앞의 목적에 집착하지 않고 ‘다른 삶’이라는 더 큰 목적을 향해 오래가는 ‘우둔한’ 용기일 것이다.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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