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일본에 살다김시종 지음, 윤여일 옮김돌베개·1만5000원
1929년생. 그는 부산에서 나 제주에서 자랐다. 갓 스물이던 1949년 5월, 제주 4·3항쟁의 와중에 일본으로 밀항해 올해로 예순여덟 해를 머물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함남 원산에서 나고 자라 부산에서 일하다 제주 출신 어머니를 만나 제주로 옮아가 살았다. 그렇게 8·15 해방을 맞았다.
<조선과 일본에 살다>는 일본에서 시인, 사회운동가, 한국문학 번역가로 왕성히 활동해온 ‘재일 조선인’ 김시종(87) 시인의 회고록이다. 일본에선 지난해 출간됐다.
한국어판 간행에 부치는 글에서 그는 자신의 편력을 “식민지 조선의 넓은 역사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보이지 않는 헐떡거림의 흔적”이라고 적고 있거니와, 이 회고록은 1945~49년 한국 현대사가 세계 질서(미·소)와 충돌하는 꼭짓점에서 온몸을 던졌으되 여전히 현대사에서 멸실되어 있는 사람들 중 1인의 기록으로, 우리 현대사가 수습하여 ‘보이게 해야 할’ 편력이라 할 것이다.
책은 일제 교육체제 아래 ‘황국소년’으로 길러진 유소년기에서 50~70년대 일본 시절까지를 적고 있다. 그 몸통은 8·15로 열린 해방공간과 제주 4·3사건이다. 4·3은 47년 3월1일부터 54년 9월21일까지 제주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통칭한다. 주민 28만명 중 적게 잡아도 3만여명이 죽은 “참담한 사건”은 무엇보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맞선 48년 4·3봉기를 한가운데에 두고 있다.
“닿기만 해도 상처가 나서 생각해내지 않으려고 마음 깊숙이 묻어두었던 기억”을 읽는 일은 그 자체로 고통이다. “가시 돋친 밤송이 껍질 같은 기억”이 켜켜이 스몄다 툭툭 터지는 기록을 요약하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그의 삶의 분기점을 이룬 세 장면.
첫 장면은 아버지의 슬픔이다. 소학교 6학년이던 그는 “41년 12월 ‘일미개전’(대동아전쟁)의 대전승에 무심결에 만세를 외칠 만큼” 황국소년이었다. 소년전차대처럼 학교가 장려하는 군사학교에 진학하겠다고 담임에게 용감하게 신청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3·1운동 가담자였던 아버지의 낙루. 그는 이때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부모를 버리고 싶으냐’고 낮게 중얼거리시고는 당신 방에 틀어박혔다.”
아버지의 눈물과 4년 뒤 다가온 8·15는 그에게 “식민지를 강요한 일본과 결별”하는 기점이 되었다. 열여섯 살이던 45년 12월 그는 제주도 인민위원회에 들어갔다. 처음엔 허드렛일을, 나중엔 전단지 격문을 썼다. 당시 미군정과 인민위원회는 긴밀한 실무 협력 관계에 있었다. 그는 47년 남조선노동당에 들어간다.
두번째는 오름에 피어오른 봉화. “오름에 봉화가 피어오르는 것은 산이 진달래로 물드는 어느 날이다.” 유엔의 남한단독선거 결정으로 5·10선거 등록업무개시 고시가 내려진 48년 3월30일 오후, 연락책이던 그는 궐기준비 통지를 받는다. 4월이 밝아오려면 이틀이 남은 쌀쌀한 날 그는 동료들과 제주농업학교에서 ‘4·3의 날’에 뿌려질 전단(삐라) 필사 작업을 했다. “시민 동포여, 경애하는 부모형제여! 4·3의 오늘, 당신의 아들딸이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매국적 단독선거, 단독정부에 결사반대하며.” 4·3 새벽 1시 수많은 오름에 봉화가 피어올랐다.
각설하거니와, 그 뒤엔 미군정과 경찰, 서북청년단의 무자비한 진압과 사살, 이에 대한 무장대(남로당 제주인민유격대)의 보복과 충돌의 연속. 김익렬과 김달삼의 평화교섭 무산은 도민 초토화 작전의 서막이 되었다.
“쫓아온 경찰이 지근거리에서 카빈총을 연사해 후두부가 날아간 ‘에이치’(H)는 문에 매달린 채 절명했다. 마치 으깨진 두부처럼 깨어진 유리에 뇌수가 선을 그으며 늘어졌다.”
48년 5월, 김시종은 동료 ‘에이치’와 함께 우체국 화염병 운반·투척을 시도했다. ‘에이치’는 화염병을 집어들다가 바로 옆에 제 사촌이 있는 걸 알고는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질렀다. 이에 경찰이 발포했고, 에이치는 당겨야만 열리는 문을 한사코 밀다가 죽었다. “주먹 크기로 크게 뜬 에이치의 새하얀 눈”을 뇌리에 박으며 김시종은 필사적으로 현장을 빠져나와 미군기지 ‘하우스보이’로 일하던 친구의 도움으로 그해 말까지 그 기지와 어느 집 지하 방공호에 숨어 지내고, 다시 외숙부 집 뒷밭 ‘씨감자구덩이’에서 이듬해 2월까지 지낸다. 조카를 뒷밭에 숨긴 외숙부는 집을 찾아오는 경찰에게 푸짐한 밥·술을 대접했는데, 이를 경찰 토벌대에 협력하는 것으로 오인한 무장대의 보복으로 2월13일 “외숙부는 장이 불거진 채로 뒤쪽 돌담을 기어올라 샛길로 떨어졌다.” “(외숙부의) 울부짖는 소리는 내가 숨은 바로 맞은편에서 울리고 있었다.”
마지막은 제주 탈출의 시간. “일본어로 시를 쓰는 내게, 해방이란 다감한 소년기를 뒤틀어가며 길러낸 저 일본어의 정감·운율을 끊어내는 것이다.” 피어린 고통의 시간을 적는 필치는 차라리 적나라하게 아름다운데, 49년 5월 한밤중 바닷가, 온 힘 다해 자식 살릴 길을 꾀한 아버지와의 마지막 순간.
“이것은 마지막, 마지막 부탁이다. 설령 죽더라도, 내 눈이 닿는 곳에서는 죽지 마라. 어머니도 같은 생각이다.” 그렇게 말하고 아버지는 고개를 돌렸다.
허미경 선임기자 carme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