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라 돼지김혜순 지음/문학과지성사·8000원않아는 이렇게 말했다김혜순 지음, 이피 그림/문학동네·1만6800원
한국 여성시의 최전선을 수십년째 지켜 온 김혜순(서울예대 교수)이 시집과 산문집을 한꺼번에 내놓았다.
“훔치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재판도 없이/ 매질도 없이/ 구덩이로 파묻혀 들어가야 한다”(‘피어라 돼지’ 부분)
시집 <피어라 돼지>는 4부로 이루어졌는데, 제1부 ‘돼지라서 괜찮아’는 15개 연작이 모인 장시다. 인용한 부분은 구제역 파동 때 돼지 떼가 산 채로 파묻히는 정황을 담았다. 인간이 초래한 사태 때문에 애꿎은 돼지가 죽어야 하는 상황에 대한 분노와 슬픔과 자책이 느껴지는데,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읽히는 것이 생태적 사유만은 아니다. 재판과 매질 같은 인간사의 용어들은 우선은 돼지의 억울함을 가리키기 위한 은유로서 동원되지만, 구제역 돼지의 죽음이 단지 돼지들의 희생에 그치지 않고 인간 사회의 폭력과 고통이라는 더 넓은 의미망을 포괄하게 하는 구실 또한 지닌다.
“있지, 지금 고백하는 건데 사실 나 돼지거든. 있지, 나 태어날 때부터 돼지였어/ 더러워 나 더러워 진짜 더럽다니까. 영혼? 나 그런 거 없다니까”(‘돼지는 말한다’ 부분)
“내가 바로 저 여자야/ 못생기고 더러운 저 여자/ 배 속에 가득 망각이 들어찬 저 여자/ 머릿속에 토사물만 가득 든 여자/ 지나가던 소녀가 침을 탁 뱉는 바로 저 여자”(‘산문을 나서며’ 부분)
역시 같은 연작에서 인용한 시들에서 돼지와 ‘나’, 더러움과 깨끗함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진다. 이 연작은 화자 ‘나’가 선방에서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하는 장면에서 시작해 명상을 끝낸 그가 산문을 나서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그 사이에 여성이자 시인이자 선생으로서, 아니 한 인간으로서 경험하고 목격하는 지옥도와 같은 만화경이 펼쳐진다. 시집 해설을 쓴 평론가 권혁웅은 이 장시를 가리켜 “세상의 모든 것에 관해서 말하는 한 편의 시”라며 “놀라운 일이다. 한국의 현대시가 여기에 이르렀다”고 극찬했다.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는 김혜순이 ‘고독존자 권태존자’라는 제목으로 문학동네 카페에 연재했던 시적 산문과 그 딸인 화가 이피의 그림을 모은 책이다. 책 맨 앞에 실린 ‘애록에서’에서 ‘애록’(AEROK)은 최인훈 소설 <태풍>에서 빌려온 말. 코리아(KOREA)를 뒤집은 데서 알 수 있듯 가치가 뒤집힌 현실을 가리킨다.
“애록(AEROK)에서 쓴다./ 겨우 여기에서 쓴다./ 여기에서 살다가 여기에서 죽을 거다./ 겨우 여기에 이렇게 머물다 가려고.”
최재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