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널리안 : 책 여백에 메모하는 사람

출판계 은퇴 뒤 책 실컷 읽고 싶어도스토옙스키·카뮈 전집 59권 통독나이 들어 금방 본 책도 기억 안나포스트잇 활용해 책 사이사이 메모내 생각 덧붙여 쓴 잡문들 모아봤죠

“명색이 문학평론가로서 나름대로 공들여 쓴 비평집에는 반응이 없다가 잡문을 모아 낸 책에는 언론이 더 큰 반응을 보이는 게 묘하네요. 비평가인 내 잘못인지 아니면 신문 생태계의 변화 때문인지….”

원로 문학평론가 김병익(75)은 자신의 책 <조용한 걸음으로>(문학과지성사)에 쏟아지는 언론의 관심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다는 어투였다. 자신의 ‘전공’이라 할 평론에 비해 여기(餘技)에 해당하는 산문집이 더 커다란 관심과 환영을 받는 모양새가 아닌 게 아니라 본말이 전도된 듯한 느낌을 주기는 했다. 이 책에는 그가 두 비평집 <기억의 타작>(2009)과 <이해와 공감>(2012)을 내면서 따로 떼어 놓았던 비교적 가벼운 글들이 묶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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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산문이라고는 해도 문학 및 책과 무관한 글을 찾기 힘들 정도로 나름의 일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또한 이 책이다. 출판 편집과 제목 짓기에 관한 이야기들, 동료 문인들의 잔치나 추모 자리에서 발표한 글들, 그리고 노년의 독서에 관한 사념 등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문학과지성사 대표를 그만둔 2000년 이후 그가 목적이나 필요에 매이지 않은, 자유롭고 게으른 독서를 통해 도스토옙스키 전집과 카뮈 전집을 통독했노라는 고백이 인상적이다.

“젊었을 때 혹은 문학과 출판 현장에 있을 때는 무언가 목적이 있는 실용적 독서를 하게 되죠. 은퇴한 뒤로는 비교적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으니까 청탁이나 주문과 무관하게 읽고 싶은 책을 편하게 읽자 싶었어요. 그래서 대학 시절부터 좋아했던 도스토옙스키 전집 독서에 도전했던 것이죠. 쓰인 순서대로 묶인 25권짜리 전집을 1권부터 차례로 읽기 시작했는데, 중간에 한국문화예술위원장으로 ‘외도’를 하느라 중단되긴 했지만 그 자리를 그만둔 뒤에 재개해서 결국 햇수로 10년 만에 끝마쳤네요. 도스토옙스키에 이어서는 34권짜리 카뮈 전집을 독파했고, 그밖에도 토마스 만의 주요작들과 루소와 다윈, 오펜하이머 등에 관한 방대한 전기와 평전, 그리고 화제가 되었던 책 <정의란 무엇인가> 등을 그야말로 자유롭게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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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자유롭게 책을 읽으면서 그가 자연스럽게 들인 버릇이 있다. 포스트잇을 활용한 ‘댓글 달기’라 할 법한 버릇이다.

“나이가 들다 보니까 기억력이 예전만 못해요. 금방 읽은 책도 내용은 고사하고 제목마저 까먹기 일쑤더라고요. 궁리 끝에 포스트잇을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책을 읽으면서 아름다운 문장이나 처음 안 사실, 인상적인 주장, 또는 나의 지난날 어느 장면을 회상시키는 글귀가 나오면 그 대목에 포스트잇을 붙여 놓았다가 컴퓨터에 메모로 옮겨 두기 시작했지요. 책의 본문을 편하게 인용하면서 거기에 내 생각과 느낌을 덧붙여 써 보는 글쓰기가 자연스럽게 나왔지요. 이런 방식이 순전한 저만의 창안인 줄 알았는데, 어디선가 그런 방식의 책 읽기를 ‘마지널리아’(marginalia)라고 부른다는 걸 보고 반가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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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번 책을 ‘문학과지성’(문지) 동인이자 평생의 벗인 문학평론가 김치수에게 바쳤다. 책 앞장에 놓인 ‘치수에게’라는 헌사 아래에는 “우리들의 남은 젊음을 위하여, 건배!”라는 말이 적혀 있거니와, 이는 동료 문인들과 어울린 술자리에서 김치수가 건배사로 외치곤 하는 구호. 김병익은 “올 초 뇌수막종으로 수술을 받고 투병 중인 김치수의 쾌유를 비는 마음을 헌사에 담았다”고 말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소년 시절부터 제 꿈은 마음에 맞는 친구들로 이루어진 조그만 소집단에 속해 살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문지 동인을 비롯한 또래 문인들과 벌써 수십 년째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바둑도 두고 한담을 나누며 저녁을 먹는 게 저로서는 그 꿈을 이룬 것이죠.”

책 말미에 붙인 후기에서 김병익은 이 책을 ‘마지막에서 두 번째’라 표현했다. “단절이 아니라 끝을 한 번 유예한다는, 종말감을 가지고 삶을 연장한다는 느낌이 좋아서”라고 그는 설명했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