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1964~1975)은 숱한 ‘개죽음’을 양산한 전쟁이었다. 역사가들이 ‘인류 도덕성을 시험한 전쟁’이란 오명을 붙여준 건, 이전까지의 어느 전쟁보다도 더 노골적으로 민간인 살상이 저질러졌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150만 명을 넘는 이 전쟁의 민간 사망자 수는 전체 전사자 수의 80%를 넘는다.
기술전쟁과 총력전이 동시에 실행된 이 전쟁은 전후방이 없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인민전쟁’으로 미군과 맞섰다. ‘인민은 물, 군대는 물고기’라는 구호처럼, ‘침략자들에 맞서 인민 전체가 벌이는 전쟁’이었기에 주민이 곧 병사, 마을이 곧 요새가 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미군은 패러다임을 뒤틀어 ‘물을 퍼내고 물고기를 잡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중남부 농촌·해안 마을의 주민들을 보금자리에서 쫓아내는 퍼내기 작전이 강행됐고, 군 보호를 받던 마을 주민들을 몰살하는 비극이 비일비재했다. 대개 노인·아이·부녀자들이었던 희생자들은 주검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채 묻히거나 흩어졌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1975년 통일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장례는커녕 주검조차 못 거둔 민간인 희생자들의 사후처리는? 주검 발굴, 추모와 의례 등은 제대로 진행됐을까? 유족들은 어떻게 그들을 기억하고 있을까?
<학살, 그 이후>는 베트남 민간인들의 비극적 죽음 이후 그들의 원혼을 달래고 기억하며 삶 속에 받아안기 위해 산 자들이 어떻게 고투해왔는지를 말하는 후일담이다. 세계적 인류학자인 권헌익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노작이자, 2007년 인류학계의 노벨상이라는 ‘기어츠 상’을 받은 이 저작은 1968년 원숭이해에 자행됐던 미군의 밀라이 학살과 파월 한국군이 저지른 하미 학살 사건을 실마리 삼는다. 1994년부터 7년여 동안 현장을 방문해 당시 사건에 대한 생존 주민들의 기억과 증언들을 상세히 취재한 기록자료에다,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인류학적·미술사적 분석틀까지 활용하면서 산 자들이 원혼들을 기억하려 애써온 상징투쟁과 자발적으로 빚어낸 추모와 저항의 미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장교가 연설을 마치고는 모인 사람들을 등지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몇 걸음 떨어지자 장교는 재빨리 손짓을 했다. 손짓을 신호로 하여 수풀 속에 숨어 있던 엠(M)60기관총과 엠(M)79 유탄발사기가 불을 뿜었다. … 군대는 2대의 불도저를 끌고 와서 집들을 밀어버리고 얕은 무덤을 짓밟았으며 미처 묻지 못한 주검들을 깔아뭉갰다. 사람들은 시신과 무덤까지 짓밟은 일을 이 사건의 가장 비인간적인 행동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가족의 기념과정이 복잡해졌다.”(85~88쪽)
책에 언급된 이 학살은 1968년 2월 25일, 베트남 중부 다낭 남쪽 해안 마을 30가구 남녀노소 135명을 3개 소대 한국군이 2시간 만에 기관총 등으로 몰살시킨 하미 사건이다. 외국 군대는 자신들이 보호하며 친교도 나눴던 주민들을 학살한 뒤에, 잔혹한 혼란까지 남겨놓았다. 주검이 뒤엉키고, 사지가 흩어졌는데도, 계속되는 소개 작전과 전투 때문에 유족들은 주검에 제대로 접근하지도 못했다. 널브러진 채 파묻힌 주검들은 전후에도 수습과 해원에 30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이 책의 설명에 기대면, 베트남인들의 전통적 사고에서 죽음에 대한 인식은 우리와 비슷하다. 집에서 맞는 ‘좋은 죽음’(쩨뜨 냐)과 길가에서 비명횡사하는 ‘나쁜 죽음’(쩨뜨 드엉)이 있는데, 대량학살을 당한 이들의 죽음은 나쁜 죽음이며, 원칙적으로 조상 사당에 모실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나쁜 죽음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진 생생한 현실이었기에 유족들에게는 딜레마가 생겨났다.
“하미와 밀라이 학살은 너무 비극적이었던 탓에 그 희생자들이 영웅들의 장소에 들어갈 수 없었고 또 너무 폭력적이었기 때문에 조상들의 ‘적극적인 공간’에 편입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너무 현실적이었기 때문에 영웅숭배의 보이지 않는 가장자리나 조상숭배의 부정적인 배경으로 좌천될 수 없었다. ”(292쪽)
그래서 주민들은 1990년대 이후 희생자 유골의 대대적인 이장과 조상·잡신 사당 재건립, 무덤 단장 등의 추모운동(비엑호)으로 이 나쁜 죽음을 선조들의 전생과 융화시키려고 애쓰며, 독창적인 의례까지 창안하게 된다. 베트남의 개방정책 ‘도이머이’의 바람을 타고 90년대 이후 새롭게 조성된 가족묘지와 조상 사당에는 학살당한 당시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아주머니’ ‘아저씨’란 명칭 아래 새 조상으로 자리잡았다. 집 안팎의 잡신 신당에는 이름 모를 학살의 원혼은 물론이고, 가해자였던 미군과 한국군 전사자의 영령까지 드나들며 향 공양을 받게 되었다. 검정콩 넣어 밥을 지은 제사음식 ‘쏘이 더우’를 먹을 때 반드시 검은 부분과 흰 부분을 같이 씹으며 ‘인민전쟁’의 가혹한 상황을 추체험하게 하는 관습도 그렇게 생겨났다.
“무덤 단장은 죽은 자들을 화합시켰다. … 부활한 조상숭배는 ‘이편’과 ‘저편’의 역사적 정치적 이원성을 가족의 전통적인 화합으로 흡수함으로써 전쟁의 유산을 무화하는 데 이바지한다.”(264쪽)
“망령을 신당에 모시는 과정은 그들의 비극적 역사를 온전히 인정하면서 이루어진다. 이 망령들이 가진 주술적 힘…이란 원통한 역사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이기 때문이다.”(281쪽)
점차 통합과 화해를 지향해온 베트남인들의 가정의례가 90년대까지 극적으로 재생되고 창조된 과정들이 바로 이 책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지는 부분이다. 주목할 건 민중들의 추모 의례가 전쟁 영웅들만을 기념하고 다른 죽음들을 도외시해온 국가 권력에 대한 일종의 저항 기제로도 작용했다는 점이다. 밀라이·하미의 주민들은 국가 주도의 열사 영웅 기념탑에 시큰둥했지만, 집단사당인 마을회관과 길가 원혼들을 불러들이는 잡신 신당에는 열성적인 의례 행위를 벌여 국가-사회간 권력 관계를 전환시켰다. 이런 변화들이야말로 냉전의 양극화 질서를 베트남 민중 스스로 풀고 해체해나간 과정임을 지은이는 간파해낸다.
건조한 학술논문 형식이지만 <학살, 그 이후>는 인문학자의 온기로 가득하다. 어떤 정치·이념 대립이나 권력의 통제도 무화시키는 화합·상생에 대한 인간의 고귀한 희망을 탐구해 거둔 결실이 이 책에 담겨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