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는 그리스 고전 전문가 강대진과 함께 읽는 트로이 전쟁 영웅 오뒷세우스(오디세우스)의 귀환 이야기다. 책은 여러 장점을 지녔다. 친절하고 믿을 만한 해설서라는 점, 입말과 글말이 일치됐다는 점, 학술적 배경을 깔면서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 여느 독자이든 전문적인 배경 지식 없이도 <오디세이아>(‘오디세우스의 시’라는 뜻)의 세계에서 편안히 놀 수 있게 한다는 점이 그렇다. 대작을 완성한 지은이의 뚝심에 존경을 표한다. 오랜만의 수작이기에, 책이 그냥 묻힐 것 같아, 시비를 좀 걸어야겠다. 이렇게 하는 게, 책도 살고, 호메로스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지 않을까 싶다.
책에는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란 부제가 붙었다. 그런데 부제의 개념들은, “오디세우스가 귀환 과정에서 신적인 삶을 버리고 인간 세계로 돌아가려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에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이 물음은 이렇게 나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거의 신과 같은 생활이 보장된 오기기아 섬의 요정 칼립소와의 동거를 거부하고, 오디세우스가 달랑 뗏목 하나에 의지해서 고향으로 향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 뒤 스케리아 섬의 왕녀 나우시카가 섬에 표착한 오디세우스를 보살피려고 다가가려 할 때에 오디세우스는 거의 성인군자처럼 행동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지, 그런데 칼립소의 달콤한 제안마저 거부했던 오디세우스가 바다 요정 세이렌을 만나서는 몸부림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렇다면 오디세우스가 감미롭게 노래 부르는 세이렌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의 실체는 무엇인지, 도대체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는 이런 곡절을 헤치고 돌아온 남편이 진짜 오디세우스인지를 시험하려 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페넬로페가 오디세우스를 슬쩍 떠보기 위해 그들만이 아는 올리브나무 침상의 비밀을 이용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등으로 말이다.
지은이는 <오디세이아>를 전후(戰後)문학이고, 일상의 복원을 기원한 작품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모험과 귀향’의 목적이 ‘일상의 복원’에 있는 게 사실이라고 해도, 실은 ‘정체성’ 문제가 오디세우스에겐 더 심각한 문제였다는 게 내 생각이다. 먼저 <오디세이아>가 칼립소를 떠나 인간 세계로 돌아오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곧, 신들의 세계에서 오디세우스는 ‘잉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오디세이아>의 귀환담에서 암시되는 ‘일상의 복원’과 관련해 지은이가 강조한 ‘질서의 회복’이다. 동의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아내 페넬로페에 대한 사랑의 확인이다. 예컨대, 오디세우스가 그를 돌봐준 나우시카에게 ‘같은 마음’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오디세우스의 말이다. “신들께서 당신이 마음으로 바라는 바를 다 베풀어주시길/ 남편과 집을, 같은 마음도 함께 있도록 해주시길 (…)/ 남편과 아내가 같은 마음으로 생각하면서 집을 지킬 때면/ 적들에겐 큰 괴로움이고 친구들에겐 즐거움이 됩니다/ 그때 그 명성은 오로지 그들 자신만 누리는 법입니다.”(6권 180-185)
이 인용구는 <오디세이아>가 부부의 “같은 마음”을 모든 관계의 기본으로 자리매김하는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물론 <일리아스>는 전사 사회의 덕목인 명예를 숭배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오디세이아>는 명예가 아니라 ‘실질’을 중시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는 부부 관계에서 오는 명예는 “오직 그들 자신만이 알고 누린다”는 언급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대목에서 적어도 그리스의 인간관계의 가장 밑바탕에는 부부간 사랑이 자리잡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물론 오뒷세우스가 부자 관계를 중시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관계는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 사이처럼 치열하지도 근본적이지도 않다. 그가 부자 관계를 우선했다면, 제일 먼저 아버지 라에르테스를 찾아 갔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마도 전쟁이란 극단적 상황으로부터 평화로운 일상의 회복을 위해 호메로스는 부부의 사랑을 더욱 중요한 덕목으로 놓은 것 같다. 여기까지가 ‘일상의 회복’과 관련해 지은이의 견해에 덧붙이고 싶은 나의 생각이다.
안재원/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