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토머스 프랭크 지음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토머스 프랭크 지음

 김병순 옮김/갈라파고스·1만6000원
김병순 옮김/갈라파고스·1만6000원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토머스 프랭크 지음, 김병순 옮김/갈라파고스·1만6000원

가난한 사람들은 왜 선거 때 부자들을 위해 투표할까?

미국의 진보적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토머스 프랭크가 던진 이 질문은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얼마 전 <한겨레> 여론조사에서 자신의 정치성향을 ‘보수’라고 답하고 총선 때 새누리당에 투표한 비율은 스스로도 경제적 ‘하층’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중·상층보다 훨씬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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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전까지 진보세력과 민주당의 표밭이었던 미국 대륙 중앙부의 캔자스주는 지금 공화당 보수우파의 아성이 됐다. 캔자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질문이 바로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의 원제(What’s The Matter With Kansas)다. 4년 전 민주당 후보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캔자스는 여전했고, 미 대륙 중부를 중심으로 한 광대한 내륙 주들에서 공화당이 승리했다. 그 결과 미국지도는 내륙의 공화당 붉은색과 동서 연안부의 민주당 푸른 색깔로 확연히 갈렸다. ‘두 개의 미국’이란 얘기가 다시 회자됐다. 4·11 총선 뒤 한국 지도 또한 새누리당 지지의 붉은 동쪽과 서쪽으로 양분됐다.

미국 내륙 주들은 상대적 빈곤지역이다. 왜 그 지역 다수 유권자들이 감세와 복지 축소, 민영화, 규제완화 등으로 빈익빈부익부를 조장하는 신자유주의 정책 신봉자들 집단인 공화당을 지지하는 걸까? 그들은 왜 엉뚱한 표적에 분노를 터뜨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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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중하층의 어려운 경제 현실을 은폐하고 그들이 자신들의 계급적 실체를 배반하는 계급적 정체성, 곧 전도된 계급의식을 갖게 만드는 데 성공한 공화당의 ‘문화전쟁’ 탓이라고 지은이는 분석한다. 그리고 민주당의 전략 실패도 빠뜨릴 수 없다.

책을 보면, 존슨카운티와 쇼니·위치토 등 본디 민주당 표밭이던 캔자스 인구밀집 지역 중하층 블루칼라들이 공화당 지지로 돌아서기 시작한 계기는 낙태 반대 운동이었다. 공화당 우파가 끌어들인 보수 기독교 우파는 낙태 반대, 진화론 교육 반대, 동성애 반대, 줄기세포 연구 반대, 생태주의와 수돗물 불소화 반대 등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펼쳤고, 이는 중하층의 경제적 곤궁이라는 현실을 그들 뇌리에서 지우고 미국 사회 쟁점을 도덕·윤리 논란으로 몰아갔다. 러시 림보 같은 극우 방송인과 <위클리 스탠더드> <폭스> <워싱턴 타임스> 등 네오콘 선전지들뿐만 아니라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등 주류 신문·방송들도 가세했다. 이 매체들에 등장한 논객들, 그들에게 자료나 논거를 제공한 수많은 연구소와 재단·싱크탱크·대학·잡지·신문·출판사들을 공화당 우파는 1960년대부터 대기업 자금을 대거 동원해 문화전쟁의 무기로 집중 지원하고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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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직공과 제철소 직공, 미용사 같은 보통사람들이, 채식하며 와인과 ‘라테 커피’를 마시고 새로운 패션을 선도하는 명문대 출신의 비판적 지식계층을 잘난 체하는 혐오스런 자유주의자들(리버럴)로 인식하고 계급의 적으로 오인하게 된 것도 이 문화전쟁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맥주나 마시고 총기를 소지하며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애국적이며 소박하고 선한 미국인으로 규정했다. 우파들이 주입한 전형적인 공화당원 마인드다. 그들은 약간은 쾌락주의적이고 퇴폐적인 할리우드류 문화와 가방끈 긴 삐딱한 자들을 사회의 기생충으로 간주하고 그들과의 전쟁을 의무로 여겼다.

자신들을 박해당하는 희생양으로 설정한 이 보수반동 전사들은 좌파들로부터 배운 수법, 곧 “경제를 뺀 좌파 세계관”으로 무장한 채 ‘성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리버럴의 비판적 리얼리즘을 무신론이나 자유주의적 편견으로 매도하는 반지성주의가 팽배했다. 걸핏하면 ‘종북’과 ‘빨갱이’를 들고나오는 우리 사회 보수반동의 전략도 이와 흡사하다. 중요한 것은, 우파들이 권력을 탈환하기 위해 불철주야 새로운 전략·전술 개발에 돈을 쏟아붓고 현장으로 달려갔다는 것이다. 이제 다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부를 빼앗아간 자본가와 의사·변호사·목사들을 우군으로 여긴다. 대기업은 국립공원을 경매에 부치고 고속도로·전철 민자화를 추진하며 수돗물 등 공공사업 민영화까지 밀어붙이고 있다. 그들의 탐욕을 제어했던 ‘뉴딜체제’는 거의 해체됐다. 우리 사회도 이를 모방하나 싶게 닮아가고 있다.

기업과 보수 거대교회의 유착은 중하층의 삶이 불안하고 부익부빈익빈 양극화가 진행될수록, 문화가 타락하면 할수록 더 단단해지고 더 크게 번성하는 구조다. 삶이 피폐해질수록 사람들은 위안을 찾기 위해 교회로 달려갈 것이며, 교회가 번창하면 그들과 손잡은 대기업들도 번성한다.

이에 비해 대책없이 거들먹거리던 민주당과 리버럴은 전통적 지지자들과의 적절한 관계맺기에 실패했다. 블루칼라 유권자들을 내팽개친 그들은 대신 자유주의적 성향의 화이트칼라 전문가들을 끌어들이는 데 역량을 집중했고 기업들에 열심히 구애했다. 그들이 노동조합보다 더 많은 선거자금을 내놨기 때문이다. 그들은 ‘계급투쟁’을 잊어버렸다. 공화당보다 약간만 더 앞서나가면 어차피 다른 데로 갈 곳 없는 중하층 노동계급이 자기 품을 떠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양다리를 걸쳤다. 뉴딜 이래 수십년 동안 싸움을 통해 쌓아온 진보적 가치와 제도를 지키는 일보다 일단 권력을 잡는 게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도시의 젊은 전문직 종사자들을 가리키는 ‘여피족’들을 얻는 대신 광범위한 전통적 지지자들을 잃었다. 민주당의 양다리 걸치기로 지지자들은 어디에 줄을 서야 할지 혼란에 빠졌고 1950년대 38%까지 올라갔던 노조 조직률은 9%대로 급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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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휩쓴 미국 중서부 내륙은 지금 민주당과 리버럴만 몰락한 게 아니라 지역 경제와 사회가 급속도로 망가지고 일부에선 공동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이 책은 말한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