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명원 화실〉
〈나의 명원 화실〉

〈나의 명원 화실〉
이수지 글·그림/비룡소·9500원


잊고 있던 어릴적 꿈의 페이지를 들춰봐
잊고 있던 어릴적 꿈의 페이지를 들춰봐

소녀의 그림은 늘 교실 뒤 벽에 걸렸다. 그것도 맨 먼저 뽑혀서 아이들의 부러운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소녀는 어떤 그림이 ‘뽑히는 그림’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전혀 어려울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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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난 화가가 될 운명’이라고 생각한 소녀는 진짜 화가를 만나기 위해 동네 화실에 등록한다. “진짜 화가는 키가 아파트만큼 크고, 얼굴은 초승달처럼 길쭉하고, 분명히 빼빼 마르고 긴 머리에 까만색 빵모자를 눌러쓰고는, 독한 냄새가 나는 파이프를 한쪽으로 삐딱하게 물고 있을 것이 분명해”라고 상상하며 화실에 달려간 소녀를, 화가는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화가는 말이 없었다. 학교 선생님처럼 ‘봄 소풍’이나 ‘우주여행’ 따위의 주제도 던져주지 않았다. 소녀는 그림 실력을 자랑하기 위해 학교에서 그렸던 그림을 똑같이 그려 냈다. 그런데도 화가는 이렇다 할 칭찬은커녕 관심도 없어 보였다.

약간은 풀이 죽어 화실을 찾은 다음날, 화가는 소녀에게 연필로 바가지를 그려 보라고 했다. 늘 노란색 크레파스로 밑그림을 그려왔던 소녀는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려 하자 손이 덜덜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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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바가지만 열장이나 그렸고 해바라기도 그렸고 수도꼭지도 그렸고 어느날 화가의 친구가 사 온 포도송이도 그렸다. 화가는 바가지와 해바라기와 수도꼭지와 포도송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얼마나 그릴 것이 많은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세상을 뚫어지도록 열심히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렇게 열심히 살펴본 것이 마음속에 옮겨지면, 그걸 조금씩 조금씩 그려 나가면 된다고. 바가지 안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담겨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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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인지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소녀는 일단 세상을 열심히 들여다보기로 했다. 그러면서 학교에서 그리는 그림과 화실에서 그리는 그림은 달라져 갔다.

가을이 왔고 화가는 소녀에게 꽃이 가득한 유리병을 그려 보라고 했다. 이제 연필은 그만 쓰고 물감을 써 보자고도 했다. 소녀는 매우 우쭐해졌다. 소녀의 반 친구들은 여전히 크레파스로 ‘가을 운동회’나 ‘공룡 시대’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겨울이 되었고 소녀의 생일도 왔다. 생일날 아침 소녀는 화가로부터 직접 그린 점묘화 카드를 받았다. 색색으로 하나하나 점을 찍어 만든 그림인데, 언뜻 보면 하늘도 있고 언덕도 있고 새도 보이는데, 눈을 부릅뜨고 보면 더 많은 것들이 보였다. 무수한 점들이 빛 속에서 햇살도 만들고 구름도 만들고 바람도 만들고 있었다. 순간 소녀의 마음속 어딘가에서 펑 하고 무엇인가 터지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나의 명원 화실>은 스스로 그림을 꽤나 잘 그린다고 생각하는 소녀가 화가를 만나면서 가랑비에 옷 젖듯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변해 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마치 아이가 직접 쓴 일기 같은 느낌을 주는 이유는 지은이 이수지씨의 자전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직접 그림도 그렸는데 노랑·주황·파랑 세 가지 색으로만 풍부한 색감을 표현해내고 있다. 미국·유럽 등지에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지은이는 ‘스위스의 가장 아름다운 책’ 상 등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강김아리 기자 a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