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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생각

‘욕심’을 버려라 ‘최소’를 지켜라

등록 :2008-05-02 20:44

‘겁 많은 자의 용기’ 펴낸 이문영 명예교수
‘겁 많은 자의 용기’ 펴낸 이문영 명예교수
격동기 민주투사 노학자의 회고록
최소화 효과 내려면 자기희생 필요
“대통령은 국민이 정직하도록 도와야”
인터뷰 / ‘겁 많은 자의 용기’ 펴낸 이문영 명예교수

1960년 4·19혁명 때 서울시내 대학 교수들의 가두시위 장면을 찍은 역사적인 사진들 중에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구호를 적은 플래카드를 앞세운 고려대 교수들 사진이 있다. 그 사진 왼쪽 앞에서 네댓 번째에 그가 서 있다. 그 5년 뒤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막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위수령을 발동하고 고려대에 군대를 투입했을 때, 그는 본관 앞에서 항의성명을 낭독했다. 4명의 성명 공동작성자 중 발표현장에 남은 건 그 한 사람이었다. 그때 그는 <창세기>에서 야훼가 아담을 향해 한 말인 “너 지금 어디 있느냐?”를 떠올리며 “피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했다.”

1973년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장으로 있을 때는 지하신문 <민우지> 사건으로 김낙중·노중선 연구원에게 봉급을 주지 말라는 중앙정보부 압력을 거부했다가 급기야 학교에서 쫓겨났다. 1976년엔 ‘3·1민주구국선언’에 참여했다가 결국 구속됐고 1979년 ‘와이에이치(YH)사건’ 때도 감금당했으며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때 다시 영어의 몸이 됐다. “그때는 참 무서운 시대였다. 나는 의당 해야 할 최소한의 발언을 했을 뿐이다.” 그 시절에 그는 모두 17번 붙잡혀 갔고 3번 해직돼 총 9년 8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으며 3번 구속돼 5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1984년에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로 복직했다가 1992년 정년퇴임한 이문영 교수. 1927년 생이니 어느덧 81살. 퇴임 뒤에도 경기대와 평택대에서 강의를 계속하면서 <협력형 통치-원효, 율곡, 함석헌, 김구를 중심으로>(2006) 등 ‘행정의 최소조건’ 5부작을 완성하며 ‘본업’ 연구를 계속해온 그가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겁 많은 자의 용기>(삼인)를 냈다. 가족을 중심으로 한 삶의 궤적, 민주화운동을 중심으로 한 사회활동, 종교적·철학적 성찰 등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 자서전이다.

“나는 허약하고 얼뜨고 눈이 크고 겁이 많았고 시험지만 보면 벌벌 떨었다.” 그는 전체 교수회의에서도 “벌벌 떨면서” 발언했다. 전쟁 때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한 노인에게 끌려가면서도 저항 한번 제대로 못 했다고 했다. 저 완악했던 시절의 완강한 비타협 저항운동가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다. 하지만 1978년 그가 낸 첫 수필집에 한완상 교수가 처음 붙여 주었던 이 제목의 방점은 ‘겁’이 아니라 ‘용기’에 찍혀 있다.


〈겁 많은 자의 용기〉
〈겁 많은 자의 용기〉
책의 제1부 제1장 제목이 ‘괴로움과 슬픔’인데, 이 교수는 평생을 함께 한 아내 김석중씨(지난해 작고)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도 괴로움과 슬픔으로 요약했다. 거기엔 자신의 어릴 적 어두운 그늘이 배어 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평생 추구한 영성의 ‘깊이’와 ‘정의’와 ‘비폭력’의 싹을 읽어냈다. 그게 그가 말한 내면에 감춰져 있던 “용기의 인자”였는지 모른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교회 부흥회 때 동생을 때린 것을 뉘우치며 크게 울었다.” 공부를 잘 못해 여덟 차례 입시시험에 낙방한 끝에 겨우 들어간 배재중에서 “공부를 잘하되 나라를 위하여 기독교 틀 안에서” 하기로 결심했다. 보성전문에 들어갈 때는 11 대 1의 관문을 자력으로 뚫었다. 그리고 “악한 통치자에게 저항하되 내 아버지같이 의연하게” 하기로 다짐했다. 아버지는 창씨개명 하라며 찾아온 형사에게 “창씨개명 하라고 어디 법에 있습니까”라는, “적의 이성이 감히 거절하지 못하는” 조용하나 단호한 한 마디로 요구를 물리쳤다. ‘민주주의의 적’과 맞섰던 시절의 고난에 대해 “나는 의당 해야 할 최소한의 발언을 했을 뿐”이라고 한 이 교수 신념의 뿌리가 거기에 있다. 용기의 인자를 발아시킨 동력은 이처럼 교회·학교·가정이었고 거기서 읽어낸 ‘괴로움과 슬픔’, ‘가르침’이었다.

“나는 뼛속까지 서울사람이다. 하지만 김대중씨를 도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의를 위해서였다. 내가 한 자리 달라고 했으면 아마 거절 못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최소’를 지키기란 쉽지 않다. 자기희생이 동반되지 않으면 최소를 지킬 수 없다.” 실제 그는 부총재 자리를 제의받았을 때도 응하지 않았다. 이 ‘최소’주의야말로 책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주제다. 부제도 ‘지켜야 할 최소에 관한 이야기’다.


그의 ‘최소’는 다양하게 변주된다. “서양 속담에 ‘카페트에 구멍이 나는 것은 남자구두가 아니라 뽀족한 여자구두 때문이다’라는 게 있는데, 요컨대 핀포인트를 포착하고 힘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북 햇볕정책도 그에겐 ‘친북’이 아니라 ‘최소’다. 그런데 그 햇볕정책이 제대로 굴러가도록 하기 위해서도 ‘최소’를 지켜야 한다.

“유럽은 노동조합이 많고 또 힘도 세다. 대신에 운동을 평화적으로 최소화한다. 물론 우리와는 사정이 다르다. 운동을 최소화하게 하려면 정부가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줘야 한다. 노동자의 자녀들이 대학을 거저 다닐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부자들한테서 세금을 많이 걷어야 한다. 부자들이 세금을 많이 내는 대신 그들에 대한 저항은 약화된다. 말하자면 대타협을 이뤄야 한다. 우리도 노동 쪽이 강해져야 하지만 실력행사는 최소화해야 한다.” 최소화하려 하나 한쪽이 계속 일방적으로 나오면 어떻게 하나? 이 교수는 “이성을 활용하라”고 했다. “적의 이성이 감히 거절하지 못하는” 핀포인트를 공격해서 최소화 효과를 올리라는 얘기로 들렸다. 대신 욕심을 버린 최소는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말고 사수하라는 것이 된다.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으로 알려진 그는 “정직해지라고 하지 않고 모두 유능해지라고만 하는” 우리 사회에 대해 걱정하면서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권력을 쥔 자들이 먼저 잘 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얘기도 했다. “대통령은 국민의 일자리 만드는 이가 아니라 국민을 정직하게 만드는 이여야 한다.” 교회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 맥락. “목사는 교인들한테서 돈을 거두는 이가 아니라 교인들이 죄를 안 짓도록 돕는 이여야 한다.” 그러면서 “삼성의 비리를 폭로한 사람이 왜 개신교가 아니라 가톨릭 쪽으로 갔는지 생각해 보라”고 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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