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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생각

“햄릿은 유약하지 않고 역동적이었다”

등록 :2008-04-04 22:56수정 :2008-04-04 23:02

‘나의〈햄릿〉강의’ 펴낸 여석기 교수
‘나의〈햄릿〉강의’ 펴낸 여석기 교수
인터뷰 / ‘나의〈햄릿〉강의’ 펴낸 여석기 교수

변화하고 성찰하는 입체적 인간형
고해로 점철된 삶에 대한 성찰자로 전환
66년간 부여안고 씨름한 노학자의 무게

“스무 살에 <햄릿>을 처음 만났으니 햇수로 66년인가요?”

1942년 솜털이 보송보송하던 도쿄 대학 영문과 새내기는 어느덧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이 됐다. 여석기 고려대 명예교수(사진ㆍ86)의 곁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놓여 있다. 세월은 그의 얼굴에 주름을 보태고 강의를 지탱할 힘도 앗아갔지만, 대신 <햄릿>에 ‘나의 강의’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연륜을 선물했다. <나의 ‘햄릿’ 강의>(생각의나무ㆍ1만4500원)는 <햄릿>을 66년째 부여안고 살아온 노학자가 들려주는 <햄릿> 이야기이다.

“보통 사람들은 ‘햄릿’이라는 인물을 극 속의 인물로 안 보고, 19세기 영국 낭만주의 시인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로만 이해합니다. 독일의 괴테는 고귀하고 연약한 귀공자를 떠올렸고, 러시아의 이반 투르게네프도 인간을 ‘햄릿형’과 ‘돈키호테형’으로 나눴지요. 내가 보는 햄릿은 그렇지 않습니다.”

책은 1막에서 5막까지 내용을 죽 훑어가며 ‘극 속의 햄릿’에 강조점을 찍는다. 그렇게 극 속에서 건져낸 햄릿은 ‘우유부단한 인간의 전형’이 아니라 ‘변화하고, 성장하고, 깨닫는’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인간이다. “<햄릿>은 셰익스피어 작품 중 가장 길어요. 복수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일들이 발생하는데, 그 과정 속에서 햄릿은 자꾸 변합니다. 내면적인 성장이지요.”


햄릿의 성장은 유난히 ‘물음’이 많은 극에서 끊임없이 던져지는 물음표를 이정표로 삼는다. 물음은 ‘유령의 정체는?’에서 ‘죽음은?’으로 점차 무게를 보탠다. 네 번에 걸쳐 등장하는 햄릿의 독백에는 나이테를 새기며 밑둥을 키워가듯 성장하는 그의 자아가 나타난다.


〈나의 햄릿 강의〉
〈나의 햄릿 강의〉
처음에 ‘인간이란 오직 천사에 조금 못 미치는 존재’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햄릿은 아버지를 죽인 삼촌, 그 삼촌과 결혼한 어머니를 보고 인간의 타락에 몸서리치며 성장통을 겪는다. 정의를 실현하려면 ‘악의 실행자’가 돼야 하는 딜레마는 복수를 지연시킨다. 여 교수는 3막에 등장하는 유명한 독백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가 내성적인 자기 고민에 갇혀 있던 햄릿이 보편적인 ‘인간의 조건’을 사유하는 성찰자로 전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선과 악을 모두 떠안아 고통과 고해로 점철된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의 존재 양식에 대한 폭넓은 성찰의 한 단면이라는 것이다. 5막에는 독백이 없다. 햄릿이 이미 참고 견뎌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죽음 앞에 의연한 모습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20대의 그를 매료시켰던 건 바로 이러한 햄릿의 모습이었다. “실존적 불안에 떨고 있는 현대인과 400년 전에 셰익스피어가 쓴 햄릿은 서로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지요.”

1962년 남산 드라마센터를 열면서 극작가 유치진은 첫 공연으로 <햄릿>을 올렸고, 여 교수에게 번역을 부탁했다. 이를 계기로 연극과 맺은 인연을 이어가며 그는 강단과 무대를 오가는 생활을 계속했다. 한국영어영문학회 창립위원으로 일했고, 계간지 <연극평론>을 찍어냈고,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회장을 지냈다. 이제 강단을 떠난 지는 20년이 흘렀고, 현장에서 연극을 본 지도 오래됐다. 하지만 오래도록 곱씹어 온 <햄릿>이 그저 잊혀질 리 없다.

“여든을 넘기면서 이제는 책을 쓸 기회는 없겠구나 생각했는데, 건강 상태를 보니 이 정도면 감당할 만하더군요. 한 학기 정도 <햄릿>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강의를 해본다면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그는 책에 지난 400년 동안 여러 문인과 학자들이 읽어낸 햄릿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충분히 녹여냈다. 그런데 자신은 살짝 뒤로 숨었다. 인터뷰 중에도 작품을 설명하면서 “사실 전혀 새로운 얘기는 아니지요”라고 입버릇처럼 되뇐다. 아흔을 바라보는 학자에게도 400년을 뛰어넘은 고전의 무게는 간단치 않은 모양이다. “골치 아픈 부분이 있으면 마음껏 뛰어넘어 읽으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햄릿>의 해석을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으려는 그의 배려가 엿보인다. 작품을 까다롭게 이해하는 건 학자들에게 맡기고, ‘나의 햄릿’을 즐기라는 얘기다.

글 김일주 기자 pearl@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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