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 널고 있는 여인 어느 북부 남자가 빨래를 널고 있는 여인을 보고서 이렇게 말했다. “웬만하면 저 아낙네가 손수 빨래를 다 했을 것이고, 저 옷들은 다른 사람들 것이겠죠. 빨래 한 바구니 해주는 데 반 크라운씩 받는 조건으로 빨았거나, 아니면 옷을 빌려와서 공짜로 빨았을 거예요. 저 옷들을 전당 잡히면 다음주 금요일까지 쓸 돈이 생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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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시대 하인들 에드워드 시대에는 200만 명 이상의 가내 하인들이 있었다. 급료는 형편없어서, 동이 트기도 전에 아침식사용 은제 식기를 준비해야만 했던 사진 속의 하녀(왼쪽) 같은 경우 1년에 12파운드가 고작이었고, 정원사의 경우에는 그보다 조금 더 받았다(오른쪽). 그러나 적어도 먹고 자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었고, 화목한 가정은 곧 좋은 일자리를 의미했다. <북폴리오> 제공
부두 노동자의 자녀들 이들의 아버지들은 시간당 6펜스의 최저임금을 의미하는 이른바 ‘부두 노동자들의 태너’를 위한 파업에 참가 중이었다. 시위자들은 생선 대가리를 들고 트라팔가 스퀘어에서 퍼레이드를 했는데, 그들이 얼마나 형편없는 음식을 먹고 살아야 하는 처지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결국 목표는 달성되었지만 부두 노동자 같은 일용직 노동자들의 생활은 여전히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기에 급급한 실정이었고, 아이들은 가로등에 매달려 빙글빙글 돌면서 노는 식의 오락거리를 스스로 만들어내야 했다. 미끄럼틀과 그네가 갖춰진, 세금으로 운영되는 놀이터는 먼 훗날의 이야기였다. <북폴리오> 제공
빈민가 아이들 맨발인 것으로 보아 집에서 가족과 함께 사는 아이들이었을 것이다. 버림받거나 고아원으로 보내진 아이들의 경우에는 자선단체에서 최소한 1인당 매주 6실링 정도의 비용을 들여 음식을 먹여주고 옷을 입혀주고 신발을 신겨주는 등 적절히 보살펴주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슬픔에 차고 기운이 쇠하고 일에 치인 엄마들” 대부분은 그 비용의 절반 수준을 감당하기도 어려웠다. 요크 지역 가정의 4분의 1가량이 빈민수용소보다도 못한 생활환경에 처해 있었다. <북폴리오> 제공
케이블 설치하는 일꾼들 꼿꼿하고 위압적인 자세로 서 있는 감독관 앞에서 일꾼들이 허리를 굽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이때 벌써 ‘주인과 종 사이에 영원히 지속되는 봉건관계’가 손실을 초래하고 있음 (이와 달리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상사와 훨씬 더 평등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을 깨달았다. 파업으로 인해 매년 엄청나게 많은 작업시간이 낭비되었다. <북폴리오> 제공
파업 마찰 파업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벽에 붙은 포스터가 묻고 있다. 트로츠키가 이끄는 적군과 백군이 맞붙었던 러시아 내전에 영국은 백군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러시아로부터 공산주의의 불꽃이 옮겨 붙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윈스턴 처칠의 표현대로 “볼셰비키를 싹부터 잘라버리려는” 이러한 시도는 별 소용이 없었다. 독일 역시 매우 불안정했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배상금과 영토 이양에 대한 요구로 인해 매우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데일리 뉴스〉는 “독일은 완전히 발가벗겨진 상태에서 주머니를 다 털어 놓으라는 협박을 받고 있다.”고 논평했다. 유럽은 이미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붉은 클라이드사이드’와 국내의 혁명 가능성에 대한 공포는 기우였다. 영국은 천성에 맞게 안정적인 사회를 유지했다.잡지 〈존 불〉에 매력적인 광고가 하나 실렸는데, 그것은 사기였다. 이 잡지의 편집인이자 소유주인 하원의원 호레이쇼 보톰리는 사실 이 시대의 위대한 허풍선이였다. 그는 당첨자 없는 복권과 상환금 없는 채권으로 독자들을 속였다. 또 다른 사기꾼인 로버트 맥스웰의 선임자 격이었던 그는 결국 1922년에 사기 혐의로 유죄선고를 받았다. <북폴리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