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현 번역가는 20년간의 산속 생활을 정리하고, 지금은 고향인 홍천으로 돌아와 선산에 집을 짓고 300여평의 논밭에서 자급하며 살고 있다. 본인 제공
최성현 번역가는 20년간의 산속 생활을 정리하고, 지금은 고향인 홍천으로 돌아와 선산에 집을 짓고 300여평의 논밭에서 자급하며 살고 있다. 본인 제공

최성현(68) 번역가는 종종 말해왔다. 스물여덟살에 우연히 읽은 책 한권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완전히 뒤바꾸었다고. ‘전세계 자연주의자들의 경전’이라고 알려진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짚 한오라기의 혁명’이었다. ‘자연농법’을 통해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고 삶 속에서 신을 만날 수 있음을 설파하는 내용으로, 자연농법이란 무경운, 무농약, 무비료, 무제초 등 4무(無)를 실천하는 농법이다.

그는 “1만2천여년의 농업 역사에서 땅을 갈고 비료를 주고 벌레를 잡고 잡초를 뽑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는데 그게 필요 없다고 하니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힌 책이었다”며 “이 책을 통해 소명을 얻었다”고 말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처럼 자연농법을 알렸으며, 예수를 만난 베드로처럼 그물을 놓고 길을 나섰다. 동국대 대학원에서 노장철학을 공부한 뒤 연구원으로 일하던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그만두고 충북 제천의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 전기도 이웃도 없는 산골 오지에서 자연농법으로 자급자족하며 살기 시작했다. “인간은 먹고살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하는데, 농사를 지으면 내가 먹을 것을 직접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접해온 강단 철학이 아닌 ‘살아 있는 철학’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연 속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내 목소리로 나의 노래를 할 수 있겠다는 영감을 얻었죠.”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일본어 원서로 읽었던 ‘짚 한오라기의 혁명’을 비롯해 ‘자연농법’ ‘자연농 교실’ ‘신비한 밭에 서서’ ‘나무에게 배운다’ ‘여기에 사는 즐거움’ 등 자연과 생태에 대한 책 20여권을 우리말로 옮겼다. “내가 혼자 읽고 혼자 알기에 아까운 것들을 남들에게 나누기 위해서 번역을 했다”는 그는 “다른 언어권에는 한글 언어권에 없는 경험과 소식이 있는데 그걸 소개해 세계를 넓혀주는 게 번역가의 기쁨이자 자부심”이라고 말했다. ‘자연농법’은 그가 번역하기 전에는 한글 언어권에는 없던 세계였고, ‘자연농법’ ‘자연농 교실’ 등은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으며 국내 자연농의 교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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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넓혀준 세계는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직접 펜을 들어 산속에 사는 소박하지만 풍요로운 삶을 전하기도 했다. ‘바보 이반의 산 이야기’ ‘그래서 산에 산다’는 데이비드 소로의 뒤를 잇는 생태적 삶을 보여주는 한국판 ‘월든’이다. 최근 펴낸 에세이 ‘무정설법, 자연이 쓴 경전을 읽다’는 그가 자연에서 배운 가르침을 전한다. ‘무정설법’이란 감정이 없는 하늘, 바위, 바다 등이 설법을 한다는 뜻으로, 대자연이 전하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일러준다.

최성현 번역가가 자신의 집 앞에 키우고 있는 마늘밭에서 작물을 살펴보고 있다. 본인 제공
최성현 번역가가 자신의 집 앞에 키우고 있는 마늘밭에서 작물을 살펴보고 있다. 본인 제공

무려 20년간의 산속 생활을 정리하고, 지금은 고향인 홍천으로 돌아와 선산에 집을 짓고 300여평의 논밭에서 자급하며 살고 있다. 그가 오랫동안 이어온 하루 일과는 일정하다. 새벽 3∼4시에 일어나서 점심까지는 책상에서 책을 읽고 번역도 하고 글도 쓴다. 점심을 먹고 나서 해질녘까지는 논밭에서 몸을 쓴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루틴은 손글씨로 엽서를 쓰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버스를 기다리면서 엽서 쓰는 걸 좋아했어요. 논밭에서 일하다 보면 하루가 여러 가지 소식도 주고 참 은혜롭거든요. 그걸 흘려보내기가 아까워서 매일 엽서를 쓰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2000통이 넘었네요. 하루 중 엽서 쓰는 시간이 가장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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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을 고루 쓰는 삶은 칠순을 앞둔 나이도 강건하게 만들었다. 앞으로도 농사와 번역, 글쓰기에 대한 정진은 계속된다. 남은 과제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면 지혜의 나무, 즉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인류가 에덴에서 추방됐는데, 저는 그 지혜가 ‘농업의 시작’으로 보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 동물들은 천지가 주는 것을 먹고사는데, 인간만이 지혜를 통해 유일하게 농사짓는 동물로 살게 되면서 에덴에서 쫓겨난 거죠. 에덴, 즉 숲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농업을 버려야 합니다. 자연농의 목표는 농사를 버리고 숲에 들어가서 농사를 안 짓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는 이제 숲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잃어버렸잖아요. 그걸 되찾는 것이 제 인생의 남은 과제죠. 그것만 생각하면 마음이 설렙니다.”

그는 인터뷰 당일 선물로 준비했던 두릅나무에서 딴 새순을 깜빡하고 주지 못했다며 며칠 뒤 우편으로 보내왔다. 엽서에는 손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올해도 두릅나무에서 새순이 났습니다. 자주 하는 말이지만, 제가 키운 나무가 아닙니다. 산이, 아니 지구가, 더 정확히는 천지가 키운 나무입니다. 저는 따기만 했고요. 그러니 제 이름으로 보내는 것이 마음 편치 않습니다.” 자연에 대한 경이와 감사, 그 앞에 두 손을 모은 겸손이 꾹꾹 눌러쓰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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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이런 책들을 옮겼어요

자연농법

‘농사는 자연이 짓고, 농부는 그 시중을 든다’는 부제가 말해주듯 자연에 철저하게 항복하면서도 벼, 보리, 채소, 과수 등을 풍성히 키워내는,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50여년 경험과 비법을 전한다. 최 번역가는 “이 책이 인류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말하고 있고, 내 눈에는 이 길밖에 없는데 그 길을 안내하는 책”이라고 추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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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마사노부 l 정신세계사(2018)


어제를 향해 걷다

도쿄를 떠나 작은 섬으로 이주해 짐승을 키우고 농사를 짓고 뜰을 가꾸며, 모두가 앞으로 내달리는 세상에서 어제를 향해 걷고자 했던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야마오 산세이의 산문집. 최 번역가는 “저자가 자연과 공생하는 길을 매우 치열하게 살았고 그 삶을 진솔하게 글로 옮겨서 매우 좋아하는 작가”라고 소개했다.

야마오 산세이 l 상추쌈(2022)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반야심경

총 262자밖에 안 되는 짧은 경전으로 널리 암송되지만 워낙 함축적이라 그 뜻을 온전히 헤아리기 어려운 ‘반야심경’을 붓다의 인생론과 행복론이 집약된 ‘엑기스’로 풀어내는 해설서다. 최 번역가는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린 반야심경 해설서이자, 불교 용어를 쓰지 않고도 일상의 언어로 쉽게 풀이하고 있다”고 평했다.

야마나 테츠시 l 불광출판사(2020)


돈이 필요 없는 나라

돈이 필요 없는 나라가 된다면 우리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모두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모든 게 공짜인 세상이 된다면, 결혼과 가족제도, 학교와 교육 등은 어떻게 달라질지 판타지 소설처럼 보여준다. 최 번역가는 “우리 사회의 새로운 모델로 생각해볼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보여주는데, 굉장히 재미있다”고 전했다.

나가시마 류진 l 샨티(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