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이미지뱅크, 그래픽 성기령 기자 grg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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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서재
독재자의 책읽기와 혁명
제프리 로버츠 지음, 김남섭 옮김 l 너머북스 l 3만1000원

혁명가, 국가 건설자, 근대주의자, 괴물, 천재, 제노사이드 범죄자, 군사지도자….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이 지닌 여러 얼굴들이다. 그는 1930년대 중반 공포통치로 자국민 수십만명을 희생시킨 잔혹한 폭군이었지만, 나치 독일의 패망을 이끌고 미국의 패권을 견제하며 사회주의 소련의 토대를 다진 유능한 지도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 독서가이자 지식인이라는 스탈린의 색다른 면모를 부각시킨 책이 있다. 한국에도 번역된 ‘스탈린의 전쟁’의 지은이인 소련사 전문가 제프리 로버츠(아일랜드 코크대 명예교수)의 신작 ‘스탈린의 서재’가 그것이다.

폭군이자 독재자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스탈린은 “어릴 때부터 열렬한 독서가”였으며, 그것도 “매우 적극적이고 열성적이며 체계적인 독서가”였다는 것이 지은이의 소개다. 스탈린은 분명 폭군이었지만 동시에 “끝없는 읽기와 쓰기, 편집에 몰두한 지식인이기도 했다.” 독서가이자 지식인으로서 스탈린의 면모를 설명하고자 지은이는 스탈린이 남긴 장서와 그 책들에 적힌 메모 및 표시에 의지한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했을 때 그의 다차에는 2만5000권의 책과 정기간행물, 팸플릿으로 이루어진 장서가 있었다. 흐루쇼프의 개인숭배 비판 여파로 그것들은 여러 도서관으로 흩어졌는데, 그 가운데 스탈린 자신이 표시하고 주해를 단 400점 가까운 텍스트들이 기록보관소에 살아남아 독서가 스탈린의 흔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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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은 밑줄을 긋거나 옆 여백에 수직선을 긋는 것으로 흥미 있는 페이지, 단락, 구의 텍스트에 표시를 했다. 강조를 덧붙이고 싶으면 구절에 두 줄을 긋거나 둥근 괄호 안에 구절을 집어넣었다. 그는 어떤 체계를 제공하려고 관심 있는 항목에 번호를 매겼는데, 이 번호는 높은 두 자리 숫자에 이르고 단일 텍스트의 수백 페이지에 표기될 수도 있었다.”

이런 비언어적 표시만이 아니라 그는 언어적 표시 역시 다채롭게 남겼다. 경멸의 표현으로는 ‘하하’, ‘횡설수설’, ‘말도 안 되는 소리’, ‘쓰레기’, ‘바보’, ‘쓰레기 같은 놈’, ‘악당’, ‘꺼져’ 같은 말들이 있었고, 그와 반대로 ‘그렇지-그렇지’, ‘동의함’, ‘좋아’, ‘정확해’, ‘옳아’ 같은 긍정의 표현도 있었다. 당장 호오의 표시를 하기 어려워 생각에 잠기게 되는 대목에는 ‘므-다’(m-da)라는 표현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 번역하기 어려운 말은 ‘정말?’ ‘확실해?’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스탈린이 가장 빈번하게 단 주석은 라틴어로 ‘주의’를 뜻하는 NB(nota bene) 또는 그에 상응하는 러시아어였다. 이런 언어 및 비언어 표시를 아울러 가리키는 말이 러시아 단어 ‘포멧키’인데, 지은이는 스탈린이 남긴 포멧키를 통해 해당 텍스트에 대한 스탈린의 반응을 추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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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이 하루에 300~500페이지를 읽었다는 증언들이 있지만, 그가 소련 지도자로서 감당해야 했던 업무량을 생각하면 믿기 힘든 수치다. 그럼에도 그가 부지런히 책을 모으고 읽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역사가 레오니트 스피린에 따르면 스탈린의 장서 가운데 1만1000권은 러시아와 세계 문학의 고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비문학 서적으로 가장 많은 것은 수백 권에 이르는 레닌의 저술이었다. “스탈린은 레닌을 숭배했”으며 “레닌 인용의 대가로 유명했다.”

1938년 크렘린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는 스탈린. 너머북스 제공
1938년 크렘린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는 스탈린. 너머북스 제공

스탈린은 청년기에 급진 서점과 비밀 독서 모임을 통해 혁명가의 길에 들어섰고, 평생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부하며 이념적 무장을 공고히 했다. 그가 자신의 장서를 분류하도록 지시한 메모에서 마르크스주의 저자들의 명부는 레닌-마르크스-엥겔스-카우츠키-플레하노프-트로츠키-부하린 등의 순서로 이어진다. 경쟁자이자 정적이었던 트로츠키가 여섯 번째 자리를 차지한다는 점이 이채로운데, 스탈린의 장서에는 40여 권에 이르는 트로츠키의 책과 팸플릿이 포함되어 있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의 책에 “바보!”, “당의 독재―그렇지 않음”이라는 비판적 메모를 달기도 했지만, 그와 함께 “맞아!”, “정확해”처럼 동의의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그는 ‘단기강좌 소련사’라는 책의 견본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연표에 자신의 생일이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선을 그어 그것을 지우고 옆에다가 이렇게 썼다. “개자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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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은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의 회고록을 열독하며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현실주의, 실용주의, 전술적 유연성”을 마음에 새겼을 것으로 지은이는 헤아린다. 1935년에 발행된 ‘부르주아 국가의 헌법들’이라는 책의 미국 섹션에 적극적으로 포멧키를 남긴 것은 그가 이듬해 발표된 새 헌법 초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미국 헌법을 참고했음을 알려준다고도 설명한다.

스탈린은 열성적인 문학 독자였고, 사회주의 문학의 성격과 향방에도 큰 관심을 지녔다. 1928년 일단의 프롤레타리아 극작가들이 미하일 불가코프의 희곡에 드러난 “우익”적 위험을 스탈린에게 경고하는 글을 쓰자 스탈린은 “문학에서 공산주의적이기를 요구하는 것, 이는 불가능합니다”라는 말로 불가코프를 옹호했다. 그는 또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 톨스토이를 위대한 예술가로 높이 평가하며, 작가의 세계관을 그의 예술 작품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1941년부터 1955년까지 수여된 스탈린상 수상작을 결정할 때 그의 견해는 “정치적 고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과 높은 예술적 수준을 고집하는 것 사이에서 왔다 갔다 했다.”

‘스탈린의 서재’의 지은이 제프리 로버츠 아일랜드 코크대 명예교수. 코크대 누리집 갈무리
‘스탈린의 서재’의 지은이 제프리 로버츠 아일랜드 코크대 명예교수. 코크대 누리집 갈무리

‘스탈린의 서재’는 스탈린의 장서와 그 책들에 남긴 그의 표시를 통해 그의 이념과 감정, 내면과 행동을 추적한 독특한 방식의 전기다. 스탈린을 사이코패스가 아니면 냉혹한 독재자로만 여기는 이들을 향해 지은이는 그의 새로운 면모를 이렇게 설명한다. “스탈린은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정서적으로 이해력이 뛰어나고 감수성이 예민한 지식인이었다. 실제로 스탈린이 수십 년간 야만적인 통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깊이 간직한 신념에 대한 정서적 애착의 힘 덕분이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