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 속 우주
우주론의 새로운 시대를 열다
앤드루 폰첸 지음, 박병철 옮김 l 알에이치코리아 l 2만6000원
과학은 자연현상을 관찰하여 가설을 제시하고 실험과 관측으로 이를 검증해 이론으로 만든다. 그 대상이 너무나 거대해서, 또는 아득할 정도로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어서 실험과 관측이 곤란한 경우라면 어떨까? 먼 우주는커녕 태양계도 벗어나 본 적 없는 인간은 ‘우주는 극도로 밀도가 높은 한 점에서 대폭발로 탄생했다’, ‘기체 구름이 자체 중력으로 뭉쳐서 별이 되었다’, ‘우주는 지금도 가속 팽창하고 있다’ 등 오늘날 우주를 설명해주고 있는 이론들을 도대체 어떻게 건져 올린 것일까?
‘상자 속 우주’는 영국의 우주론학자 앤드루 폰첸(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 교수)이 ‘우주론 시뮬레이션’을 설명하는 책이다. 시뮬레이션은 “현실 세계에서 진행되는 현상을 컴퓨터로 모방하는 작업”의 총칭으로, 이를 우주에 적용한 것이 우주론 시뮬레이션이다. 시뮬레이션을 그저 현실에서 실행하기 어려운 실험을 컴퓨터 속에서 대신 수행하는 것 정도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지은이는 우주에 대한 연구의 역사를 훑으며 시뮬레이션이 “물리학의 범주를 넘어 계산과 과학, 인간의 창의력이 혼합된 과학계의 종합예술”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시뮬레이션의 기원은 일기예보다. 19세기 미국 기상학자 클리블랜드 애비와 20세기 스코틀랜드 물리학자 루이스 프라이 리처드슨과 도러시 부부는 유체(fluid)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 세 개를 활용해 물리법칙으로 날씨를 예측해내는 방법을 모색했다. 시뮬레이션의 두 가지 핵심 요소는 ‘초기조건’과 ‘규칙’(물리법칙)이다. 초기조건을 숫자로 변환한 뒤 주어진 규칙을 적용하면 대상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다. 선구자들은 당시 발달된 통신 기술(전신)에 힘입어 초기조건을 확보할 수 있다는 데에서 출발했으나, “엄청난 속도로 계산을 수행하는 획기적 기술”, 곧 컴퓨터의 개발과 발전에 활용하기까진 좀 더 기다려야 했다. 게다가 과학자들은 시뮬레이션 안에 초기조건과 규칙 외 숨겨진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대기 중 모든 원자와 분자를 추적하고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시뮬레이션은 대상을 격자(그리드)로 구획하는 등 단순화시키는 방법을 동원한다. 이때 격자 내부에서 미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예컨대 강우를 유발하는 작은 구름의 생성-을 놓치게 된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서브 그리드’를 설정해 규칙으로 유도되지 않는, 대략적인 계산과 경험에 의존해야 하는 별도의 규칙을 반영시켜 시뮬레이션의 정확성을 높이는 방법을 찾아냈다.
우주 시뮬레이션 역시 지구의 대기 시뮬레이션과 비슷하다. 과학자들은 우주의 핵심 운동이 중력이란 걸 알았다. 2차대전 중 스웨덴 천문학자 에리크 홀름베리는 전구를 활용해 “중력의 세기를 빛의 광도로 변환”하는 방식으로 100만년에 걸친 별들의 움직임을 재현했는데, 초기조건으로부터 일정 단계까지 움직임을 진행시킨(‘드리프트’) 뒤 중력을 고려하여 그 경로를 수정(‘킥’)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컴퓨터도 없이 수행한 이 시뮬레이션에서 “두 은하가 가까이 접근하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나로 합쳐진다”, “두 은하가 충돌하면 나선형 팔이 생긴다” 등의 사실이 발견됐다.
우주의 규모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제한되는데다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 대부분은 미지의 물질이란 어려움이 있다.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가 중요한 이유다. 1970~80년대 ‘천문학의 대모’ 베라 루빈은 은하가 그 형태를 유지하면서 회전한다는 사실로부터 “보이지 않고 감지되지도 않으면서 중력을 행사하는” ‘암흑물질’의 존재를 제시했고, 마크 데이비스와 그 동료들(‘4인조 갱단’)은 “상자 속 우주 시뮬레이션에 표준 드리프트-킥 정식을 적용하여 엄청난 중력을 발휘하는 암흑물질이 수십억년에 걸쳐 물질 네트워크(‘코스믹 웹’)를 구성해온 과정을 실감 나게 보여주었다.” 그 뒤 마거릿 겔러는 이 코스믹 웹이 수억 광년에 걸쳐 뻗어 있는 개별적인 ‘끈’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발견해, ‘반중력’ 특성을 지녀 우주를 팽창시키는 물질인 ‘암흑에너지’의 존재를 제시했다.
별과 은하의 생성과 소멸 등 ‘눈에 보이는’ 5%가 되레 난제를 던졌다. 예컨대 우주에는 기체가 널려 있으니 모든 것을 중력에 맡겨두면 우주 공간은 이들이 모두 별로 뭉쳐 밝은 빛으로 가득차 있어야 하지만, 우주망원경 허블이 촬영한 ‘딥 필드’ 사진에서 은하는 예상한 것보다 훨씬 작았다. 이는 앞서 천문학자 비어트리스 틴슬리가 제기했던 “별은 은하 속에서 얼마나 빠르게 형성되는가” 물음과 연관된다. 이에 대해 틴슬리의 동료였던 리처드 라슨은 “별의 생성 속도를 조절하는 무언가가 우주 전역에 걸쳐 작용하고 있다”는 ‘피드백’ 아이디어를 냈고, 그 뒤 시뮬레이션에서 별이 소멸하고 다시 생성하는 과정에서 암흑물질이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초창기 우주와 광활한 코스믹 웹,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은하와 별, 행성을 하나로 연결”해주고 있다는 핵심적인 사실이, 시뮬레이션에 힘입어 밝혀진 것이다.
1980년대 이후로 우주론학자들은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양자역학’을 도입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우주가 이런 모양인지, 그러니까 한 점에서 시작된 우주의 밀도가 왜 지금처럼 균일하지 않은지 해명하려면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중우주론’ 등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론들까지 도출해냈으며, 급기야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자체가 시뮬레이션일 수 있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만약 현실을 100% 재현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이 가능하다면, 우리가 그 속에 있을 확률도 50%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시뮬레이션은 현실 세계를 담은 팩시밀리가 아니며, 앞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도 없다”고 단정한다. 그가 볼 때 시뮬레이션의 진정한 목적은 가상에서 현실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 지식과 통찰, 그리고 과학자들 사이의 협력을 체계적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 그 자체의 본질이기도 하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