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베트의 만찬
이자크 디네센 지음, 추미옥 옮김, 노에미 비야무사 그림 l 문학동네(2012)

노르웨이 피오르 지역의 작은 산골 마을에 마르티네와 필리파라는 두 자매가 살고 있다. 자매의 세례명은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와 그 친구 필리프 멜란히톤에서 따왔을 정도로 자매의 아버지는 지역의 교파를 일군 독실한 목사였다. 신도들은 세속의 쾌락을 거부하고 서로를 형제자매라 부르며 서로를 욕하는 법 없이 살아갔다. 목사의 딸들 역시 젊은 시절 지고지순한 사랑과 대처로 나가 성공할 기회가 차례로 주어졌지만, 스스로 그 기회를 물리치고 조용히 금욕적인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목사가 세상을 떠난 후 신도 수는 줄고 마을 사람들도 서로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바베트라는 낯선 프랑스 여인이 자매를 찾아온다. 바베트는 프랑스 혁명 중 코뮌 지지자로 활동하다 ‘페트롤뢰즈’(석유로 가옥에 불을 지른 여자라는 뜻)로 붙잡힌 후 가까스로 노르웨이로 탈출했다. 처음 자매의 집에 왔을 때 쫓기는 짐승처럼 불안해 보였던 바베트는 12년째 이곳에 머물며 노르웨이 가정식 요리도 척척 해내고 까다로운 상인들을 상대로 흥정도 능수능란하게 해낸다. 이런 바베트를 사람들은 ‘까무잡잡한 마르타’(신약성서에 나오는 여인으로 남을 돌봐주길 좋아하는 유형을 말한다)라고 부르며 이 이방인을 보내준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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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바베트 앞으로 오래전 파리에서 구입한 복권이 당첨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든다. 자매는 1만 프랑이라는 거금이 생긴 바베트가 곧 프랑스로 돌아가리라 생각하고 아쉬워하는데, 뜻밖에 바베트는 자매의 아버지 목사의 100번째 생일을 기리는 만찬을 직접 프랑스식으로 차리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바베트가 파리에서 주문한 온갖 식재료와 귀한 술들이 도착하자 평생 금욕적으로 살아왔던 자매는 극도의 불안을 느낀다. 급기야 만찬 전날 밤 바베트가 요리에 독을 타는 악몽까지 꾼 언니 마르티네는 신도들을 찾아가 만찬 자리에서 바베트의 음식에 관해서는 어떤 말도 꺼내지 않기로 약속한다.

드디어 만찬의 시간이 찾아오고, ‘까무잡잡한 여인’과 바베트가 구해온 조리사 보조 ‘빨간 머리 소년’이 요리와 식사 시중을 시작한다(까무잡잡한 피부와 빨간 머리는 유럽에서 마녀 혹은 혐오의 대상으로 취급받았다). 신도들은 처음 경험하는 놀라운 맛에 감탄하지만, 약속대로 음식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맛’에 자극당한 혀는 또 다른 기능인 ‘말’로 이어져, 만찬이 무르익는 사이 불화했던 신도들은 즐거웠던 한때를 추억하며 화해하고, 사랑을 억눌렀던 연인들은 긴 입맞춤을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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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이 끝나고 자매는 바베트가 자신들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복권 당첨금을 모두 만찬 재료비로 써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놀라며 미안해하는 자매에게 과거 유명 요리사이자 혁명가였던 바베트가 당당히 선언하는데, 이는 평생 낯선 곳을 이방인으로 떠돌며 ‘마녀’로 오해받아왔던 작가 이자크 디네센의 말로도 읽힌다.

“아니에요. 전 절대로 가난하지 않아요. 저는 위대한 예술가라니까요. 예술가들에겐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것이 있어요.”

이주혜 소설가·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