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간신'에서 연산군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 김강우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영화 '간신'에서 연산군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 김강우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연산군 평전을 쓰려고 ‘연산군일기’를 읽고 있다. 평전을 관통하는 주제는 ‘폭군과 여자’다. 어디 기녀 쪽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 연산군은 기녀를 ‘운평(運平)’이라 명칭을 바꾸고, 그중 대궐에 불러들인 기녀는 ‘흥청(興淸)’라 불렀다. 나아가 자신과 성관계를 한 기녀는 특별히 ‘천과(天科) 흥청’이라 하였다. 수천 명 운평도 마음에 차지 않았는지, 그는 각 지방에서 기녀를 계속 뽑아 올리게 하였다. 조선의 모든 기녀는 폭군의 소유가 된 것이다.

1504년 7월4일 누군가가 학정(虐政)을 비난하는 언문 익명서를 신수영(愼守英, 연산군의 처남)의 집에 던져 넣자, 폭군은 언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금지했다. 하지만 금령을 어기는 자가 있었다. 겸사복(兼司僕) 한곤이 애인인 기녀 채란선(採蘭仙)에게 ‘예쁘게 꾸미면 운평으로 뽑혀 갈 것이니, 예쁘게 꾸미지 말라’고 언문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연산군은 한곤을 능지처참(凌遲處斬)에 처했다. 모든 기녀가 자신의 소유였기 때문이었다.

폭군의 잔학(殘虐)함에 모두 숨을 죽였으나, 한 사람 장록수(張綠水)만은 예외였다. 장록수는 똑똑했고 보비위를 잘했지만 너무 가난한 탓에 몸을 팔아먹고 살았다. 남자도 여럿 바꾸었다. 그러다 제안대군(齊安大君, 예종의 둘째 아들) 집안 노비의 아내가 되어 아들 하나를 낳은 뒤 춤과 노래를 배워 창기(娼妓)가 되었다. 그녀의 노래는 곱고 맑아 들을 만하였다. 또 어떤 방법을 썼는지 알 수는 없으나, 서른 남짓에도 16살 아이처럼 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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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소문을 듣고 장록수를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미모는 보통 수준을 넘지 않았으나, 교사(巧詐)한 태도와 아양은 그녀를 넘는 사람이 없었다. 연산군은 장록수를 즉시 숙원(淑媛)에 봉했다. 그녀의 말이라면 모두 들어주었고 금은(金銀)과 주옥(珠玉)으로 비위를 맞춰 주었다. 나라의 곳간을 기울여 장록수의 집으로 재물을 실어 보냈다. 엄청난 규모의 노비와 가택, 전지(田地)가 그녀의 몫이 되었다.

희한한 것은 장록수는 폭군을 어린아이처럼 대했고, 어떨 때는 종처럼 놀리고 모욕했다는 것이다. 폭군은 화가 났을 때도 장록수만 보면 헤벌쭉하고 웃었다고 한다(이상 장록수에 관한 서술은 모두 ‘연산군일기’ 8년(1502) 11월25일 조에 의함). 알 수 없는 폭군의 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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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6년(연산군 12) 9월2일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연산군은 쫓겨나 교동현(喬桐縣)으로 옮겨졌다. 연산군이 독점했던 여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운평과 흥청은 모두 원래 자리로 돌아가 다시 기녀가 되었다. 장록수는 연산군이 총애했던 전비(田非), 백견(白犬)과 함께 군기시 앞에서 참형에 처해졌다. 군중은 기왓장과 돌멩이를 그녀들의 음부(陰部)에 던지며 말했다. “온 나라의 고혈(膏血)이 여기서 탕진되었다!” 기왓장과 돌멩이는 순식간에 무더기를 이루었다고 한다(‘연산군일기’ 12년(1506) 9월2일 조에 의함).

2달 뒤 연산군은 역질(疫疾, 전염병)에 걸려 물 한모금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숨이 넘어갈 때 자신의 악행을 한사코 말렸던 정처(正妻) 신씨(愼氏)가 떠올랐다. ‘보고 싶구나!’ 하고 내뱉은 것은 그녀였지, 간살을 떨던 장록수가 아니었다. 사족 한 마디. ‘연산군평전’을 쓰면 사람들이 좀 읽을까?

강명관/인문학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