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의원(內醫院)은 왕실 병원이다. 곧 왕의 건강과 질병을 돌보기 위해 설립한 것이다. 당연히 내의원에는 최고급 약재(藥材)가 쌓여 있다. 어느 날 경연관(經筵官)이 왕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의원의 약재는 본디 어용(御用) 약재이기에 더할 수 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대부들이 걸핏하면 그 약재를 달라고 하여 가져다 씁니다. 내의원 의관들도 그 요구에 응하고 있으니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금지해야겠습니다.” 내의원의 약재는 원래 왕의 전용품이다. 사대부들이 달라는 대로 약재를 내어 주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으니 금지하자는 것이다.
왕은 이렇게 답한다. “내의원이 아니면 진귀한 약재를 어디서 구하겠는가? 내의원에 약재를 많이 쌓아두는데, 대궐 안에서 쓰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약재는 본래 사대부와 같이 쓰기로 한 것이다. 남는 것을 주는 것을 금지할 수는 없다.” 대궐에서 쓰는 소량을 제외한 나머지 약재는 원래 사대부들과 함께 쓰기로 한 것이니, 앞으로도 달라는 대로 주라는 것이다.
18세기 인물인 박양한(朴亮漢)이 자신의 에세이집 <매옹한록(梅翁閑錄)>에 실은 효종의 일화다. 이야기 끝에 박양한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진정 성인의 말씀이다. 사대부들이 이 말씀을 들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 할 것이다.” 배려 깊은 왕의 말씀에 사대부들이 감격하여 목숨을 내놓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왕과 약재를 공유하는 사대부 곧 사족(士族)이란 어떤 존재인가?
이 일화 앞부분을 읽어본다. 박양한은 조선 사족의 속성은 중국과 다르다고 말한다. 중국의 경우 천하의 인민들 중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벼슬길에 올라 고위관료로 출세할 수 있다. 만약 벼슬을 하지 못한다면 그저 평민일 뿐이다. 따라서 고위관료의 자식이 평민이 되기도 하고, 평민의 자식이 고위관료가 되기도 한다. 조선은 다르다. 세습적 사족이란 것이 있고, 이들만이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갖는다. 곧 사족은 잠재적 관료 집단이다. 현재 관직이 없어도 고위관료와 동등한 사회적 위상을 갖는다. 이것이 중국과 다른 점이다. 효종이 왕실 병원의 약재는 원래 사족과 나눠 쓰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던 것은, 사족이 자신과 함께 민(民)을 지배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박양한은 같은 의미로 내부의 귀·천에 상관없이 사족은 ‘국가’와 휴척(休戚,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이때 ‘국가’는 곧 왕과 관료들의 집합체인 조정(朝廷)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왕과 사족은 당파로 나뉘어 죽고 죽이는 투쟁을 벌였지만, 지배의 특권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한통속이라는 말이다.
최근 죄를 저지르고도 아비의 권세로 인해 처벌받지 않은 자식들이 자주 출현하는 것을 보면, 한국사회에도 조선의 사족과 다를 바 없는 세습적 특권층이 형성된 지 오래인 것 같다. 이 문제를 교정할 수단은 정치일 터인데, 정치는 그들의 지배욕을 실현하는 장치가 된 지 오래다. 정당으로 나뉘어 날마다 저급한 행각과 언어로 싸우기는 하지만, 역시 한통속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선거가 반복되어도 사족 아닌 사람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이유는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새 길은 어디에 있는가? 내년이 총선이다.
강명관/인문학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