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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생각

[책&생각] ‘개취’와 ‘동의’는 섹스를 진정 자유롭게 하는가

등록 :2022-09-30 05:00수정 :2022-09-30 10:35

섹스에 대한 정치 비평 멈춘
페미니즘에 던지는 논쟁적 질문

“미투 이후 ‘동의’ 여부에 함몰…
‘개취’ 너머 정치 규범 인식해야”

섹스할 권리
아미아 스리니바산 지음, 김수민 옮김 l 창비 l 2만2000원

“이건 모두 여자라는 인간 종이 내가 가진 가치를 볼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 어떻게 내가 아닌 열등하고 못생긴 흑인 남자애가 백인 여자애와 만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아름답고 절반은 백인인데.”

2014년 5월23일. 스물두살 미국 남성 엘리엇 로저는 이러한 글을 남긴 후 무차별 테러를 감행했다. 룸메이트 3명을 살해한 뒤 그가 향한 곳은 ‘여학생 사교 클럽’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여성 3명을 총으로 쏘았고, 추가로 총기 난사를 이어가다 자살했다.

다수 페미니스트들이 이 글에서 ‘인셀’(비자발적 독신주의자) 특유의 비뚤어진 ‘성적 권리의식’(남성은 섹스할 권리가 있다. 그것이 강압·폭력적인 방식일지라도)을 포착하고 분개할 때, <섹스할 권리> 저자 아미아 스리니바산은 다른 지점에 주목했다. “내가 놀랐던 부분은 인종, 내향적 성격, 전형적인 남성성 결여 때문에 성관계나 연애에서 주변화되었다는 로저의 주장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명백한 무관심이었다.” 로저는 앞선 글에서 순수 백인이 아닌데다(그는 백인-중국계 말레이시아 혼혈이다) 왜소한 체격, “남자답지 않은” 성격 탓에 백인 여성에게 줄기차게 거절당했던 ‘상처’가 범행의 동기가 됐다고 밝혔다. 이런 로저의 자가 진단이 저자는 “원론적으로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인종주의와 이성애 규범성이 로맨스와 섹스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는 건 사실이다. 실로 그것들이 가장 깊게 뿌리내리는 곳은 ‘개인의 선호’ 논리를 통해 보호받는 친밀한 관계의 영역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이 점에 대해 할 말이 전혀 없었던 걸까?”

섹스라는 ‘사유지’가 ‘동의’라는 울타리 속에서 철저히 보호되어 왔지만, 이러한 철학·입장·관행에 ‘점검’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그동안 ‘안티섹스’(가부장제가 남성 지배-여성 종속의 섹스 관행을 형성했다. 섹스·결혼을 거부하라)와 ‘프로섹스’ 혹은 ‘섹스에 긍정적인 페미니즘’ 사이 대치가 이어졌으나, 1980년대 이후 상호 ‘동의’가 이뤄졌다면 섹스의 ‘내용’에는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페미니즘이 주류를 점해왔다. 이른바 ‘성적 자유주의’다.

&lt;섹스할 권리&gt; 저자 아미아 스리니바산. 영국 옥스퍼드대 최연소이자 최초 여성·유색인 올솔스 칼리지 사회정치이론 치첼리 석좌교수인 그는 대학에서 페미니즘을 가르치고 있다. 첫 저작인 &lt;섹스할 권리&gt;는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오웰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창비 제공
<섹스할 권리> 저자 아미아 스리니바산. 영국 옥스퍼드대 최연소이자 최초 여성·유색인 올솔스 칼리지 사회정치이론 치첼리 석좌교수인 그는 대학에서 페미니즘을 가르치고 있다. 첫 저작인 <섹스할 권리>는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오웰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창비 제공

그러나 저자는 “성적 선택이 자유로워야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동시에, 가부장제 아래에서 이러한 선택이 좀처럼 자유롭지 않은 이유도 알아야 한다”는 점을 짚는다. 백인 여성과의 성관계를 선망하고, 반대로 아시아계 남성을 선호하지 않는 ‘개취’(개인의 취향)가 “태생적, 원초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결과물임을 자각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처절하게 외로움과 소외감을 토로했던 로저가 그럼에도 끝끝내 백인 여성만을 고집했던 이유는, “꼴리는 몸=성관계 ‘상대방’에게 지위를 부여하는 몸”이기 때문이고, 이 “꼴리는 몸”에 인종화된 위계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남성, 여성의 욕망을 정치비평의 접근 불가 지역으로 설정할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성큼 들어가 욕망에 드리워진 정치·문화적 규범의 흔적을 더 면밀히 살펴야 한다고 저자가 주장하는 이유다. “최선의 상황에서는 우리의 욕망이 정치에 따른 선택을 거부하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총기 난사로 여대생 등 6명을 숨지게 한 엘리엇 로저가 범행 직전 유튜브에 업로드한 살인 예고 비디오의 한 장면. (AP연합뉴스)
2014년 총기 난사로 여대생 등 6명을 숨지게 한 엘리엇 로저가 범행 직전 유튜브에 업로드한 살인 예고 비디오의 한 장면. (AP연합뉴스)

로저의 글에서 뻗어 나온 저자의 주장은, 가해자의 처지에 이입하고 피해자에게 욕망의 ‘점검’과 ‘훈련’을 주문하는 결론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동의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실제 영국에서 표제작 ‘섹스할 권리’가 게재된 이후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페미니즘 계파와 역사를 수없이 횡단하며 논의 전선을 계속 넓혀나가는 작법 또한 독자를 다소 답답하게 만든다. 그러나 정치·사회적 백래시에 포위된 오늘날의 페미니즘에 무력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곳곳에서 돌파구처럼 느껴지는 문장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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