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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생각

[책&생각]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계급이 없나

등록 :2022-06-24 05:00수정 :2022-06-24 17:00

영국 노동계급 체험탐구 표방한
이주여성 작가 브래디 미카코

사회 혼란 원흉 지목된 ‘아저씨’
그럼에도 “쓰러지지 말라” 위로
이들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자본과 노동력의 이동 속도보다 빠르게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노동계급의 활로라는 듯. 사계절 제공
이들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자본과 노동력의 이동 속도보다 빠르게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노동계급의 활로라는 듯. 사계절 제공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영국 베이비부머 세대 노동 계급의 사랑과 긍지
브래디 미카코 지음, 노수경 옮김 l 사계절 l 1만7800원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것도 아저씨들 탓이고,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도 아저씨들 탓이다… 성희롱과 약자에 대한 괴롭힘도 아저씨들 탓이며, 정치가 부패하고 기득권 세력만 잘사는 것도 아저씨들 탓이다….”

1996년 영국에 정착해 결혼이민자로 글을 써온 브래디 미카코(57)의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의 말머리는 다음 질문으로 구체화된다.

수년간 전 세계를 흔들고 2020년 1월 마침내 단행된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의 지지자들은 모두 보수주의자인가. 수년간 아니 지금도 트럼프를 지지하고 한때 워싱턴 의회까지 점령했던 이들은 어떤가. 민주주의와 글로벌 경제의 프로토콜을 수출했던 국가들의 두 집단은 같은 세대, 같은 진영인가. 도처의 진단대로 백인 노동자 계급의 반란인가.

책은 분류하자면 참여관찰형 ‘아저씨 생태보고서’인데,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거장 켄 로치 감독(<빵과 장미> <나, 다니엘 블레이크> 등)이 인물과 사건을 도로 영화에 옮겨도 이상할 게 없는, 5060 백인 노동자의 ‘웃픈’ 단막들로 저 담론을 재생해낸다는 점에서 돋을새김된다. 앞서 꽤 알려진 전작(<아이들의 계급투쟁> 등)이 있어 망정이지 관찰자가 일본인 이주여성이란 점은 더 그렇다. 5060 노동계급의 삶을 신(scene)별로 재구성하면 이렇다.

#1신 체념

인물 모두 영국 브라이턴의 공영주택지대에 산다. 1956년생 레이, 더덜없이 ‘노동자 계급’을 웅변한다. 부모는 도장공-청소노동자, 중학교 졸업 뒤부터 일해 지금은 파견회사의 차수리공. 전후 베이비부머 세대로, 자칭이 “노동자 계급”이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영국) <옥토버 스카이>(미국)에서처럼 자식은 아버지의 노동 세계에 머물길 요구받기도 한다. 계층 상승의 고투, 되레 초래될 가족의 붕괴가 두려워서다.

레이는 2016년 6월 브렉시트 투표에 찬성했다가 30대 동거녀한테 작살나고 몇 년 뒤 ‘이별’당한다. “(대학등록금이 무료였던) 계급 상승 가능성이 남아있던 마지막 노동 계급세대”의 드물게 잘난 아들(40대, 은행원)한테도 훌닦인다. 홀로 서야 하는 레이, 때마침 정규직 채용에서도 혼자만 미끄러지지만, 다 그러려니 한다. 도장공 친구 션은 아예 실직하고 욕실을 공동사용하는 ‘베드시트’로 이사하질 않았는가. “이 나이가 되어서…” “이런 일이 생겨도 이상”할 게 없는 삶. 그리 합리화 않고선 저부터도 당장 내일 뜨는 해를 지켜보기 어렵다.

#2신 신념

그렇다고 신념이 없지 않다. 체념도 신념 안에서 허락된 거다. 암을 앓았던 브래디의 남편은 두통이 심해도 병원을 가지 않고 있다. 영국의 무상복지로 추앙받던 ‘엔에이치에스’(NHS·국민보건서비스)가 사실상 작동 안 한 지 오래. 수요를 줄이려는 의도에서 ‘일반의→전문의’의 진료 단계가 ‘일반의와의 통화 예약→통화→진료 예약→일반의 진료→전문의 진료’로 기괴하게 늘어져, 두세 달이 걸린다.

남편이 꼭 돈 때문에 유료 민간병원 대신 엔에이치에스 병원을 고집하는 건 아니다. 그는 “(민간병원에 감으로써) 대처(신자유주의를 밀어붙인 보수당 총리)한테도, 글로벌 자본주의한테도 질 수 없다”는 신념으로 아내가 예약한 민간병원 일정도 취소해버린다. 영국 노동계급이 마지막 지키려는 “이데올로기”가 결국 “노동자를 죽이고 있”는 셈이다.

#3신 친절

13년 노동당 집권 이후 2010년 권력을 쥔 보수당은 긴축재정을 앞세운다. 공공병원·학교가 문을 닫는다. 브래디 직장이던 무료탁아소가 없어졌고, 아동센터는 팔려 중산층 아파트가 된다. 도서관도 커뮤니티센터 내로 축소 이전된다. 공공서비스의 축소·부재를 노동계급들은 자발적 ‘공동체’로 보완하기도 한다.

과거 복지정책 혜택으로 실업수당을 받으며 여생을 버텨온 스티브가 대표적이다. 1.5평도 안되는 도서관 한쪽에서 부러 더 책을 읽고 업무통합으로 바빠진 직원의 도서 대출을 돕는다. 동네 중국인 불법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10대 청소년들의 차별과 위협이 노골화하자 순찰단을 규합해 물리치기도 한다. ‘공동체 국가’의 영원한 소실과 망각을 막아내려는 안간힘에서 비롯한 모순이리라.

#4신 대결

그 레이와 그 스티브, 그리고 션, 브래디 남편 모두 브렉시트 열렬한 지지자다. 더 많은 백인 노동계급이 “이민자가 늘어 학교와 병원이 감당할 수 없다” “주권을 되찾아야 한다” 논리로, 잉글랜드 축구팀의 승리를 갈구하듯 브렉시트를 연호했다. 이들은 사실 패배를 예상했다. 하지만 ‘샤이 보수’, 더 많은 ‘본심’들을 확인하며 승리했다. 반대세력, 특히 젊은이들에겐 절망이자 공포였다.

브렉시트를 통해 유럽연합 분담금이 엔에이치에스에 투입되리란 가짜뉴스에 노동계급들이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엔에이치에스에 대한 그들의 강한 신념은, 엔에이치에스밖에 이용할 수 없는 이민자들에 대한 혐오와 이미 오래전 맞닿을 수밖에 없다.

하여 이들 삶의 마지막 신은 무엇이어야 할까. 조카를 포함한 배달서비스 노동자들의 연대파업 준비를 돕는 또 한명의 강경 브렉시트파였던 사이먼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영국을 방문한 2019년 6월 “우리의 엔에이치에스를 내주지 않겠다”고 쓰인 플래카드를 들고 25만명이 집결했다는 런던 항의시위에 동참하고, 같은 주장을 하는 젊은 시절의 연인을 만나 연애도 시작한다. 낙오한 계급과 낙오할 새도 없던 세대의 연대가, 무엇보다 사랑이 대안이 될까. 이만한 작위성을 켄 로치 감독이 반길 리 없겠으나 이것이 리얼리즘인데 도리가 있겠는가.

조지 오웰이 오래전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꿰뚫은 노동의 빈곤은 비교적 선명하다. 하지만 지금 노동(자)의 적은 국적, 민족, 젠더, 종교, 이념 따위 중복층화된 무형체로, 자칫 나의 신념이 내 가족의 안녕을 해치기도 한다. ‘아저씨’는 이 혼돈의 구조에서 어른의 몫을 요구받는 자다. 브래디 미카코가 이 엄혹한 삶의 존엄을 위로하려고 술과 음악에 대한 신뢰를 글의 밑자락에 배경처럼 흠씬 깔아둔 이유였겠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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