쳐가는 노래
진은영 지음 l 창비(2012)

며칠 전 수업을 막 마친 뒤 한 학생이 찾아와 ‘시를 읽는 일이 곧 정치성을 발휘하는 일이 될 수 있는가’ 하고 물었다. 수업 도중 우리가 함께 읽은 시는 진은영 시인의 ‘오래된 이야기’. 2012 년에 출간된 시인의 세번째 시집에 수록된 작품이다. 수업 도중 학생들은 시를 이루는 언어가 묘한 분위기를 형성한다고 말했다. ‘옛날에는 어떠했대’ 라는 식으로 건너들은 얘기를 전하는 것처럼 시작된 시가 과거의 신비를 지키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만 같다는 인상을 남기므로 갖게 되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옛날에는 사람이 사람을 죽였대 / 살인자는 아홉 개의 산을 넘고 아홉 개의 강을 건너 / 달아났지 살인자는 달아나며 / 원한을 떨어뜨리고 / 사연도 떨어뜨렸지 / 아홉 개의 달이 뜰 때마다 쫓던 이들은 / 푸른 허리를 구부려 그가 떨어뜨린 조각들을 주웠다지 // 조각들을 모아 / 새하얀 달에 비추면 / 빨간 양귀비꽃밭 가운데 주저앉을 듯 / 모두 쏟아지는 향기에 취해 // 그만 살인자를 잊고서 / 집으로 돌아갔대 // 그건 오래된 이야기 / 옛날에 살인자는 용감한 병정들로 살인의 장소를 지키게 하지 않았다 // 그건 오래된 이야기 / 옛날에 살인자는 아홉 개의 산, 들, 강을 지나 / 달아났다 / 흰 밥알처럼 흩어지며 달아났다 // 그건 정말 오래된 이야기 / 달빛 아래 가슴처럼 부풀어오르며 이어지는 환한 언덕 위로 / 나라도, / 법도, 무너진 집들도 씌어진 적 없었던 옛적에”(‘오래된 이야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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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벌어져선 안 되는 일인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버젓이 일어난 상황이 특히나 많은 이들의 사이에서 회자되는 이유를 그 살인자가 “달아나”서라고 말한다 . 제대로 된 벌을 받지도 않고“ 아홉 개의 산, 들, 강을 지나” “살인자” 는 “달아났다.” 그리고 시는 달아난 살인자의 뒤를 추적하기보다는 그가 어질러 놓은 세상 한가운데서 “그가 떨어뜨린”(아마도 살인자가 자신의 잘못을 가리기 위해 내세웠던 숱한 기만의) “조각들” 을 줍느라 여념이 없는, 거기에 취하느라 망각에 잠겨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아가는 사람들을 주목한다.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더 이상 종적을 내비치지 않으니 “흩어지며 달아” 난 살인자가 사는 이곳은 “나라” 와 “법” 과 “집들” 이 계속해서 무너지는 곳. “그건 오래된 이야기”라는 말의 반복은 이 이야기가 ‘오래 전’ 부터 시작됐을지언정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임을 암시하며 파장을 일으킨다. 시는 “살인자”가 여전히 살고 있는 곳에서 우리 역시 살고 있다는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를 이처럼 전한다.

언급한 시가 2009 년 용산 참사가 일어난 뒤 발표된 시라는 정보를 알고 있지 않은 독자일지라도, 시를 읽은 뒤에 생각에 잠길 수 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질문할 수 있다.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통치가 버젓이 “흰 밥알처럼” “흩어” 져 사방을 채우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숨지 않고 살 것인가. 그러고는 기어이 “사람이 사람을 죽” 이는 일을 합리화하는 데 동원되지 않고, 살아있는 자의 존엄을 사수하는 정치를 회복하기 위해 움직여나갈 몫이 우리에게 있음을 새길 수 있다. 시의 정치성은 지금의 치안 질서가 바꾸지 않으려는 이야기를 다르게 쓰려는 자리에 우리가 있음을 깨달을 때 발휘되는 것. 시는 옛적부터 삶의 한복판에서 이곳 너머를 겨냥하며 쓰인 것이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