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1월 15일 서울 가락동 중앙정치연수원에서 당 총재인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표위원 등 당직자, 소속 의원, 당원, 각계인사 1천7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민정당 창당 5주년 기념식에서 전두환씨 부부가 당원들의 환호에 박수치고 있다. 연합뉴스
1986년 1월 15일 서울 가락동 중앙정치연수원에서 당 총재인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표위원 등 당직자, 소속 의원, 당원, 각계인사 1천7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민정당 창당 5주년 기념식에서 전두환씨 부부가 당원들의 환호에 박수치고 있다. 연합뉴스

5공 남산의 부장들 1, 2
김충식 지음 l 블루엘리펀트 l 각 권 1만9000원

“남산하면 떠오르는 것은?”

이 질문에 ‘남산타워’나 ‘돈가스’를 떠올린다면 당신은 엠제트(MZ) 세대일 가능성이 크겠다. 하지만 40~50대 이상(또는 역사덕후) 상당수는 ‘납치’, ‘고문’, ‘공작정치’ 등을 떠올릴 테다. 군사정권 시절 정권보위를 위해 온갖 공작정치를 주도해온 중앙정보부(중정)가 남산 기슭에 있었기 때문이다. 1960~70년대 박정희 독재정권 공포정치의 대명사였던 ‘남산’의 민낯은 1990년대 초 <동아일보>에 ‘남산의 부장들’ 시리즈로 연재돼 장안에서 큰 화제가 됐다. 곧이어 출간된 <남산의 부장들> 단행본도 50만부 넘게 팔렸고, 2020년엔 이병헌·이성민 주연 영화로도 제작돼 500만명 가까운 관객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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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시리즈를 연재했던 김충식(가천대 석좌교수) 전 기자가 이번엔 1980년대로 시선을 돌렸다. 꼼꼼하게 갈무리해뒀던 취재기록에 각종 증언과 회고록 등을 종합해 ‘5공 비사’를 써내려간다. 전두환, 유학성, 노신영, 장세동, 안무혁 5명 중정(안기부) 수장들 연대기를 통해 ‘정의구현사회’를 내건 전두환 체제가 속으로는 얼마나 많은 비리와 협잡, 음모로 점철돼 있었는지 발가벗긴다.

물론 그 한가운데에는,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형편 때문에 어려서부터 신문과 한약재, 낫토(일본식 된장) 배달 같은 일을 하다 228명 모집에 226등으로 운 좋게 육사에 입학해 장군의 사위가 되고, 그 장인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과 인연을 맺어 탄탄대로를 달린 전두환이 있다.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리더였던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이란 자리를 이용해 상관과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휘두르고 정권을 접수하는 과정이 상세하게 서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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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26일 박정희가 비명에 가자, 중정은 전례없는 위기를 맞는다. 조직 수장(김재규)이 대통령을 쐈기에 ‘역모의 본원지’가 된 남산은 보안사 군홧발에 짓밟히지만, 곧 기력을 되찾게 된다. 새로 등장한 권력자도 중정의 특기였던 정치공작과 선거개입, 납치, 고문, 도청, 야당·재야인사 탄압 등을 실행할 손발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중정 예산 100억원이 민정당 창당자금으로 전용됐고, ‘국가안전기획부’로 간판만 바꿔 단 중정은 바뀐 주군에 또다시 견마지로를 다한다.

총칼을 앞세워 권력을 잡은 뒤 벌어지는 신군부 세력 사이 암투와 권력다툼, 새 권력에 줄을 대기 위해 안달하던 고위공직자와 언론인들의 모습 등도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위컴 미 8군 사령관은 회고록에 “고위공직자들이 전두환(보안사령관)에게 떼지어 몰려가 아첨하고, 전두환은 그런 상황을 즐기는 바람에 사태가 점점 더 틀어져 간다”는 세간의 평가를 적었는데, 이 전언을 전한 당사자(문형태 국회 국방위원장)조차 그렇게 하고 있다고 적었다. ‘땡전 뉴스’를 탄생시킨 <한국방송>(KBS)과 <문화방송>(MBC)의 충성경쟁은 사장 간 사이를 벌어지게 만들 정도였고, 신문들도 너도나도 나서 ‘소박하고 인자한 민주주의자’로 전두환을 포장하기에 바빴다. 김대중 사형 확정판결에 협조한 한 법관은 실세를 찾아가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직을 요청했고 안기부는 대신 대법관 자리에 추천해줬다. (대법관에 임명된지 몇달 안돼 투서가 날아들었고, 법원 여직원과 부적절한 관계가 드러나 조용히 사표를 쓰고 물러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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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추앙’하는 모리배들에 둘러싸여 무소불위 권력을 휘둘렀던 전두환도 쿠데타 초기 놀라서 졸도하는 일이 있었다는데, 바로 미국의 강경한 태도 때문이었다. 하지만 12·12 이튿날 “미군철수, 과학기술 이전, 미사일 공동개발, 무기 판매, 경제원조 등을 포함한 대한 외교 정책을 전면적으로 다시 검토할 상황에 이르렀다”(위컴 사령관, 노재현 국방부 장관 면담에서)던 미국의 태도는 “이미 군 통치권자가 되어버린 전두환을 제거할 효과적인 수단이 미국에는 없다. 워싱턴은 한국의 민주주의보다 안보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80년 1월, 브루스터 CIA 서울지부장), “민간정부는 (최근 어려워지고 있는 여러) 경제적 난관을 다룰 능력이 없다고 봐야 함”(80년 1월 말,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 전문)이라며 점차 신군부 쪽으로 기울어갔다. 그나마 정권 교체기에 있었던 미국의 카터 행정부와 레이건 인수위가 힘을 합쳐 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선고됐던 김대중 구명에 나서, 한-미 정상회담을 여는 조건으로 김대중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

정권 초기 ‘문고리 권력’을 쥐고 사실상 2인자 구실까지 했던 허화평이 간첩 형 때문에 고난을 겪은 전력 때문에 연좌제 폐지에 적극 나섰고 그 결과 5공 헌법에 관련 조항이 들어간 이야기, 유신 시절 중정 대공수사국장으로 있으면서 보안사를 특별감찰한 악연 때문에 5공 출범 뒤 법무부 검찰국장에서 법무연수원으로 귀양갔다가 박철언 비서관을 통해 충성맹세 편지까지 보냈던 김기춘(박근혜 청와대 비서실장) 검사 사연 등도 눈길을 끈다.

1995년 12월 2일 자택 앞 골목에서 전씨가 검찰 소환 방침을 정면 반박하는 2쪽 분량의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는 모습. 전씨는 이후 고향인 합천에 내려가 버티다가 체포돼 구속되었다. 연합뉴스
1995년 12월 2일 자택 앞 골목에서 전씨가 검찰 소환 방침을 정면 반박하는 2쪽 분량의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는 모습. 전씨는 이후 고향인 합천에 내려가 버티다가 체포돼 구속되었다. 연합뉴스

아, 엠제트 세대 독자라면 다 지난 30여년 전 군부정권 시절 일이 지금 무슨 의미냐고 물을 수 있겠다. 이에 저자는 되묻는다. ‘불과 몇년 전 전직 국정원장들이 줄줄이 감옥에 갔고, 윤석열 대통령도 국정원 여론조작(댓글) 사건 수사팀장에 발탁되면서 뜨기 시작했다, 한국 정치는 안기부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윤 대통령 얘기가 나온 김에 한마디 더. 신군부가 1980년 5·17 계엄확대로 정국을 완벽하게 휘어잡기 두달 전 서울대 법대에서 모의재판이 열렸는데, 쿠데타 세력에 관한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신현확 총리에게 사형을, 전두환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됐는데, 당시 재판장이 윤석열 대통령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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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는 어떤가. 김재규 사건 주심을 맡아 속전속결로 사형 확정판결을 끌어낸 대가로 대법원장으로 지명된 유태흥은 청와대 비서진을 만나 “사법부의 수장은 정치적 공안사건에는 정부에 협력해야 하고, 일반사건에서는 양심적으로 소신껏 독립해서 심판해야” 한다며 사실상 충성맹세를 한다. 국정농단 사건 수사로 드러난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의 대법원 방침과 놀라우리만치 비슷하지 않은가. 전진하는 듯하면서도 되돌아가고, 되돌아가는 듯하면서도 전진하는 게 역사일지도 모른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