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만치 혼자서
김훈 지음 l 문학동네 l 1만5000원

소설가 김훈(74)은 16년 만에 두번째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를 내면서 맨 뒤 ‘작가의 말’을 길게 썼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이야기를 펼쳐온 그가 ‘작가의 말’을 13쪽이나 할애한 게 뜻밖이다. 그 자신도 “객쩍다” 하면서 ‘작가의 말’ 대신 ‘군말’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군말’에는 수록된 7편의 해제를 일일이 붙여 작품을 쓴 계기와 후기를 에두르지 않고 독자에게 말했다. “한 사람의 이웃으로 이 글을” 쓰면서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여 이 책의 ‘군말’은 요긴한 주석처럼 읽히는데, 표제작인 ‘저만치 혼자서’가 특히 그렇다.

광고
&lt;강산무진&gt;(2006) 이후 16년만에 두번째 소설집 &lt;저만치 혼자서&gt;를 발표한 김훈 소설가. 문학동네 제공
<강산무진>(2006) 이후 16년만에 두번째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를 발표한 김훈 소설가. 문학동네 제공

김소월 시 ‘산유화’ 구절에서 제목을 따온 ‘저만치 혼자서’는 호스피스 수녀원의 이야기를 그린다. 손안나 수녀는 젊은 시절 직접 조리사자격증과 간호사자격증까지 따며 기지촌에서 헌신적으로 사역하다 여든에 이곳에 들어왔다. 정신이 쇠약해지면서 과거와 현재의 기억이 뒤섞인 그는 주사 놓는 시늉, 아이 목욕시키는 시늉 등을 하며 과거로 돌아간다. 룸메이트 김루시아 수녀는 나환자촌에서 평생 일했다. “의사들이 긴 병명을 붙였지만 병은 이름으로 지칭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에게 고통은 자신도 모르게 지리는 대소변이었다. 그는 세탁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다리로 복도 벽을 의지해 새벽마다 샤워실로 힘겹게 걸어가 속옷을 빨고 몸을 씻는다.

젊어서 ‘애기신부’라고 불리는 이 수녀원의 사목 장분도 신부는 수녀들이 처한 곤경에 대해 자신을 임명한 김요한 주교에게 보고한다. 주교는 개입하기보다는 지켜보기를, 어리석게 보여도 존중하기를 번번이 강조한다. “누구에게나 그에게 맞는 고유하고 개별적인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인간의 예절이며 하느님의 뜻일 겁니다. 죄를 짓는 것도 죄를 고백하는 것도 죄의 사함을 받는 것도 개별적인 것입니다.” ‘저만치 혼자서’ 떠나야 하는 생의 마지막에 젊은 신부가 할 수 있는 건 수녀들과 “죽음의 길을 함께” 걷고, 기도로 “세상 너머 배웅”을 하는 것뿐이다. 작가는 이를 천주교 의정부교구 상장례학교 교장으로 일하다가 2012년 마흔살로 작고한 양종인 신부를 떠올리며 썼다고 한다. 시간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육체를 감당하고 홀로 세상과 작별해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작가는 “가엾은 존재들 속에 살아 있는 생명의 힘을 생각”하며 담담하게 써내려갔다.

광고
광고

쇠락한 육체가 직면하는 삶의 비루함이라는 작가의 면면한 주제의식이 잘 드러나는 건 ‘저녁 내기 장기’와 ‘대장 내시경 검사’다. 일흔을 앞둔 이춘갑(‘저녁 내기 장기’)과 일흔을 넘긴 ‘나’(‘대장 내시경 검사’)는 이혼을 하고 혼자 지내는 노년이다. 구두 공장을 하다가 외환위기 때 부도를 내고 위장이혼이 실제 이혼으로 이어진 이춘갑은 구두 수선으로 입에 풀칠하면서 저녁마다 공원에 가 ‘저녁 내기 장기’를 둔다. 백내장과 안구건조증으로 침침해진 눈약을 처방받은 그는 약국에서 “아버님” 소리를 듣자 “허벅지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낀다. “아버지의 정충이 떠올랐고, 아내와 아들의 환영이 합쳐지면서 흔들렸다. 내가 그 환영들의 남편이고 아버지였던가 싶었다.”

기업 임원까지 마치고 은퇴한 ‘나’는 경제적 여유가 있지만 수면 대장내시경 검사의 보호자를 구하기 난감해 가사도우미에게 돈을 주고 청해야 하는 처지다. 그는 젊은 시절 연애했다가 취업이민으로 헤어진 나은희로부터 사십년 만에 연락을 받는다. 한국 들어가는 아들의 일자리를 봐달라는 부탁이다. 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어눌한 한국어 말투의 청년에게서 “아저씨”라는 말을 듣고 그는 “나와 나은희 사이에 가로놓인 격절의 시간과 공간”을 절감한다. “적절하고 불가피한 호칭”이지만 개인의 역사에 파여 있는 어떤 흔적들로 인해 편안해질 수 없는 호칭 앞에서 두 인물은 우두커니 멈춰 선다.

광고

노량진의 ‘구준생’(9급 공무원시험 준비생)의 시선으로 써내려간 ‘영자’는 지금의 청년세대가 목도하는 삶의 비루함이 노년의 주인공들에게 닥친 그것과 다를 것 없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9급 지방 행정직 시험 재수생인 ‘나’는 9급 지방 보건직 재수생인 영자와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동거를 하고 시험에 합격하자마자 변변한 인사도, 기약도 없이 헤어진다. 세상에 진입하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 보이지 않게 밀려나는 젊은 세대에 대한 작가의 안쓰러움이 묻어나오는 글이다.

책을 여는 ‘명태와 고래’는 기자 출신 작가의 또 다른 갈래, 야만적인 국가 폭력에 짓밟히는 개인을 새기는 기록으로서의 소설이다. 그는 2010년 나온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종합보고서를 읽은 후에 “두려움과 절망감 속에서 쓴 글”임을 밝히고 있다. 금강산이 가까운 강원도 동해안 포구에서 태어나 고기잡이를 하던 이춘개 가족은 한국전쟁 때 피란민에 “밀려서” 내려와 지척 남한 포구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살아왔다. 어느 날 이춘개는 명태잡이를 하던 배가 조수에 “밀려서” 북한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6개월 억류 끝에 돌아온다. 하지만 얼마 뒤 그가 북한 군인 앞에서 그렸던 동네 그림이 간첩사건으로 엮이면서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4년형을 받고 13년이 지나 출소한다.

이춘개는 모범수가 되면서 붓글씨를 배웠는데 출소 뒤 여관에 머물며 동네 그림을 그리고, 자비로 수협회관 복도를 일주일 빌려 그 그림들을 내건다. 그리고 전시 마지막 날 사체로 발견된다. 작가는 “감정을 글에 개입시키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한없이 건조한 문체로 이춘개의 사연과 마지막을 그린다. 하지만 “남쪽과 북쪽의 폭력에 번갈아 짓밟히고 제 땅에서 추방되는 사람”이 죽음을 준비하며 묵묵한 표정으로 자신이 그린 동네 그림을 복도에 걸고 한참 응시했을 모습을 떠올리면 가슴이 구겨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진다. 김훈의 글이 지닌 날카롭고도 묵직한 힘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