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하르방이 있는 일본 오사카 쓰루하시역 근처 한 식당 앞에 선 이계순씨. 허호준 기자
돌하르방이 있는 일본 오사카 쓰루하시역 근처 한 식당 앞에 선 이계순씨. 허호준 기자

“나무에 묶인 사람, 총에 맞는 사람, 조금씩 조금씩 떠오르는데 그때는 몰랐죠. 지금 돌이켜보면 ‘아, 그게 죽는 것이었구나’ 해요. 무섭다기보다 잔혹하다고 할까요. 지난 일은 곧잘 잊어버리는데 우리 어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가 죽은 것만큼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상처뿐인 기억…내가 겪은 4·3

일본 오사카 이쿠노구에서 만난 강춘자(83)씨는 4·3 때 외조부모와 어머니가 죽임을 당했다. “좁고 긴 방이었습니다.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는 자고 있었고, 외할머니는 앉아 있었어요. 내가 방 안 요강에 소변을 보려는데 경찰 3명이 들어와 순식간에 모두 잡아갔어요. 어머니 손을 잡고 나도 함께 갔는데, 경찰서에서 나를 떼어놓고 어른들만 따로 끌고 갔습니다.”

재일동포 복지시설 ‘사랑방’에서 만난 강씨의 말끝이 떨렸다. 7살 춘자는 경찰서 뒤쪽 창문을 통해 구덩이 앞에 할아버지 식구와 어머니가 서 있는 모습을 봤다. 그 앞에 경찰관 3명이 있었는데 30분쯤 지나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구덩이는 메워져 있었다. 어렴풋한 과거 기억들 가운데 이날의 장면만큼은 또렷하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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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쿠노구의 코리아타운 역사자료관에서 만난 김봉전(81)씨도 어머니와 함께 처형장으로 끌려가다 이웃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김씨의 아버지와 어머니, 형수와 2살짜리 조카는 수용소에 감금됐다가 1949년 2월1일 조천지서 앞에서 학살됐다. 김씨의 큰형과 둘째 형은 주민 10여명과 함께 중산간에 숨어 지냈다. 둘째 형이 1948년 11월27일에, 큰형은 이듬해 1월에 각각 토벌대에 희생됐다.

현순화씨. 허호준 기자
현순화씨. 허호준 기자

“군인들이 지프를 타고 내려오는데 남자옌 허민 다 죽여버렸어. 셋아버지(중부)는 바깥에서 총을 눈에 맞앙 죽어불고, 셋아버지네 밖거리(바깥채) 사는 사람도 그렇게 죽어불고, 그날은 우리 아버지가 배 타다가 들어오는 날인디 뒷집으로 피신하려고 밭 하나 넘어가다 그냥 (총 맞아) 죽어부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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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살 현순화는 쓰러진 아버지 몸을 흔들며 “아버지 일어나, 일어나” 소리치며 울었다. 1948년 11월4일. 신흥리 주민들이 학살된 그날 일을 현씨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군경을 피해 숨어 지내던 오빠는 1949년 5월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말에 제 발로 경찰을 찾아갔다가 행방불명됐다. 올케와 어린 조카도 죽었다.

“찾아온 아버지 주검을 보니 갈중이(갈옷)를 입었어. 피가 엉겨 붙어서 옷을 벗기지 못해 고세(가위)로 아버지 옷을 싹둑싹둑 잘라냈지.” 오사카 츠루미구에 사는 송춘자(80)씨의 아버지는 1947년 10월 트럭에 실려 간 뒤 함덕 모래사장에서 희생됐다. 송씨는 “아버지만 살아시민 일본까지 왕 이런 고생 안 했지. 일본 온 것이 고생이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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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면 동일리가 고향인 김대준(77)씨에게도 4·3은 깊고 깊다. “밤이 깊어서 잠을 자는데 트럭이 와서 어머니를 데려갔다고 그래요. 밖이 시끄러우니까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봤는데, 어머니가 트럭 위에서 울부짖으며 ‘우리 대준이를 부탁한다, 부탁한다’ 그랬답니다. 어머니는 경찰에 끌려갔다가 수장당했어요.” 제주도립의원 약제과장으로 일하던 아버지는 1947년 3·1절 기념대회 때 주도적 구실을 했고, 4·3 당시 행방불명됐다.

숨 막히는 섬…제주를 떠난 사연들

“4·3이 아니었으면 여기 올 이유가 있었겠어요?” 두차례 밀항 끝에 오사카에 정착한 현순화씨의 말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10대 초반의 소녀를 일본으로 떠밀었다. 오사카에서 만난 10명이 넘는 ‘재일 제주인들’은 대부분 4·3항쟁 시기 10살 안팎 또는 그보다 어린 나이였다.

“이빨로 물고서라도 순화를 데리고 가라.” 아버지가 숨진 뒤 계모가 어린 현씨를 가혹하게 대하자 보다 못한 할머니가 일본에 사는 현씨 고모한테 부탁해 일본으로 불러들이도록 했다. 현씨는 13살 어린 나이에 혼자서 밀항선에 올랐다. 각 마을에서 모인 5명이 작은 배를 탔다. 밀항선은 쓰시마에서 일본 경찰의 단속에 걸렸다. 현씨는 오무라수용소에 보내졌고, 그곳에서 3년을 지내다 고향으로 돌아왔다. 1년 뒤 17살이 된 현씨는 부산에서 다시 밀항선을 탔다. 쓰시마와 시모노세키를 거쳐 오사카의 고모 집에 도착했다.

오사카 코리아타운 역사자료관에서 만난 현승홍씨. 허호준 기자
오사카 코리아타운 역사자료관에서 만난 현승홍씨. 허호준 기자

“대학은 꿈도 못 꿨고, 일하려고 해도 취직할 곳이 없었어요. 가족들 보기에 내가 너무 딱했는지 일본으로 가라더군요. 도쿄 친척들에게 부탁해 여기로 오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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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승홍(81)씨는 고교 졸업 1년 뒤인 1961년 일본으로 넘어왔다. 일제강점기 도쿄에 살던 현씨 가족은 해방 직후 모슬포에 정착했다가 4·3을 만났다. 영문도 모른 채 대정지서에 감금됐던 아버지가 경찰에 총살된 뒤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부산 영도에서 비료용 동물뼈를 운송하는 상선 밑바닥에 몸을 웅크렸다. 배에는 제주 사람 8명이 타고 있었다. 밀항 알선업자에게 내는 선불금은 친척들이 빌려준 10만원으로 충당했다.

선창에 한번 들어가니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그 안에서 먹고 자고 볼일을 봤다. 일주일쯤 지나 가고시마에 도착했다. 세관원들이 쇠꼬챙이로 콕콕 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다행히 적발되지 않았다. 꼬박 24시간을 열차를 타고 도쿄에 도착했다. 일본에서의 삶이 시작됐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 모자공장에서 일하던 이계순씨는 1961년 5월 경남 남해에서 작은 배를 탔다. 배에 탄 사람은 40명이 넘었다. 선창에 밀어 넣고 그 위에 무엇인가를 덮었다. 사고가 나면 그대로 죽을 목숨들이었다. 남해를 출발한 배는 하루 뒤 무인도에 잠깐 멈췄고, 항해를 계속해 하카타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동향 출신 이웃의 안내로 야간열차를 타고 오사카로 갔다. 이씨의 일본행은 쓰시마까지 물질을 다니던 어머니의 계획이었다.

김대준씨가 이쿠노구 성공회센터에서 기자와 만나 ‘재일’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허호준 기자
김대준씨가 이쿠노구 성공회센터에서 기자와 만나 ‘재일’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허호준 기자

1968년 김대준씨의 일본행이 마침내 이뤄졌다. 스물한살이었다. 김씨는 동갑내기 사촌과 함께 부산항에서 견습선원 신분으로 무역선을 탔다. 배는 시모노세키를 거쳐 오사카항에 도착했다. “그 섬(제주)에서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너희는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이 나라에서 출세할 방법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들었어요. 그 와중에 일본 사시던 외삼촌이 고향 고모님 댁을 방문했는데, 저를 두고 ‘일본에 오고 싶으면 오라’고 하셨다길래 ‘갈게요’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 도착하고 한달도 안 돼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주변의 동포들 사는 모습을 보니 ‘일본 생활도 결코 쉽지 않겠구나’ 절감했던 것이다.

1950∼1970년대 많은 제주 사람들도 그렇게 갖가지 사연을 안고 밀항선을 탔다. ‘희망’을 찾아 죽음을 무릅쓰고 쪽배에 몸을 싣는 지금의 시리아 난민들처럼.

부시송씨. 허호준 기자
부시송씨. 허호준 기자

숨죽여 산 세월…경계인이 된 그들

폭풍을 뚫고 제주 바다를 건넌 이들에게 일본은 ‘약속의 땅’이 아니었다. 번듯한 일자리를 구해 편안한 삶을 사는 것은 말 그대로 꿈이었다. 이들은 ‘불법체류자’였고, 기다리는 것은 고된 노동이었다. ‘외국인등록증’이 없는 이들은 적발되면 언제든 한국으로 송환될 각오를 해야 했다.

김대준씨는 일본에 정착한 지 6년 만에 제주도 같은 마을 출신 동포 2세와 중매결혼했다. 결혼 1년 뒤 입국신고를 하러 찾아간 법무성 입국관리국에서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비웃던 고위 간부와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하길래 ‘한국으로 돌아가겠다. 대신 당신이 책임지고 내 아내와 태어날 아이를 살려야 할 거다. 그러지 않으면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외국인등록증을 받았다.

오사카에 도착하면 공부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이계순씨는 엄혹한 현실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숨어 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덜컥 밀항선을 탔건 거지요.” 이씨가 일본에 온 1960년대 초는 밀항자 단속이 극에 달했던 때다. 밀항자를 밀고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씨는 1년에 한번꼴로 단속을 피해 거주지를 옮겨 다녀야 했다. 규슈 하카타항에 마중 나왔던 동향 출신 이웃과 재봉틀로 비옷을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어릴 때 봤던 같은 마을 출신 여성과 28살에 결혼했다. 하카타항에 마중 나왔던 이웃의 조카였다.

오사카 이쿠노구에 있는 재일동포 복지시설인 ‘사랑방’. 허호준 기자
오사카 이쿠노구에 있는 재일동포 복지시설인 ‘사랑방’. 허호준 기자

이씨는 아내가 셋째를 가진 1974~75년 무렵 자녀들의 취학 문제를 고민하다가 ‘더는 숨어 사는 것이 어렵겠다’ 생각해 법무성 입국관리국에 큰어머니와 아이들까지 5명이 함께 찾아가 자진신고를 했다. 이후 기계 부속 만드는 일을 하다가 플라스틱 제조공장을 직접 차려 48년 동안 아내와 함께 일하며 자녀들을 공부시켰다.

일본에서 26살 때 제주 출신 여성과 결혼한 현승홍씨는 외국인등록증이 없어 힘든 날들을 보냈다. “도쿄에서 신발공장 다니다가 경찰에 붙잡혔지. 부부가 교도소에서 한달 남짓 살다가 친척들이 보석금 60만엔을 내줘 풀려났어. 그걸로 끝이 아니었어. 나오자마자 입국관리국에 잡혀갔거든. 다시 친척들한테 손을 벌려 보석금 60만엔을 내고 풀려났어.”

현씨는 그 뒤 매달 입국관리국을 찾아가 체류 기간을 연장했다. 1년 정도 지나자 변호사가 “이번에는 체류 연장이 안 될 것 같다”고 했다. 부부는 도쿄를 떠나 오사카로 스며들었다. “등록증이 없으니 항상 불안했어. 게다가 한국에는 군사정권이 들어섰으니 송환되면 어떤 취급을 받을지 알 수 없었거든. 당시 한국에선 4·3 때 가족이 죽은 것만으로도 빨갱이 취급 받았잖아.” 오사카에 정착한 부부는 형편이 어려웠는데도 현지의 고아원에 매달 기부금을 냈다. 3년 정도 기부하니 표창장이 나왔다. 그 덕에 외국인등록증을 받았다.

김봉전씨. 허호준 기자
김봉전씨. 허호준 기자

김봉전씨는 “외국인등록증이 없어서 불안하긴 했지만, 생활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고 했다. 그는 단속에 걸려 송환될 처지가 되면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마음먹었다. 2남 1녀를 낳은 뒤 그는 지인 4명과 함께 자진신고했다. “밤이면 혼자서 이불 뒤집어쓰고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부모님과 형님들 죽음이 평생을 따라다닙니다.” 김씨가 회한에 잠겨 허공을 응시했다.

고향 땅 제주. 그 잿더미의 시간들을 견뎠다. 목구멍까지 울음이 차오르는데 통곡할 수도, 눈물을 흘릴 수도 없었다. 그러나 살았으니 살아야 했다.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부하기 위해, 제주가 싫어서 섬을 빠져나간 재일 제주인들 상당수는 평생을 거친 노동에 종사하며 자녀들을 공부시켰다. 낯선 땅에 뿌리내려 스스로를 단련하고, 때로는 좌절해도 다시 일어서 재건한 삶, 경계인의 삶이었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독일에서 온 편지

 “피에 물든 제주 땅에 어떻게 내려서야 할까? 구두를 신은 채 이 대지를 밟아도 될까?” 김대준씨는 제주공항 비행기 트랩에 우두커니 서서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던 고향 땅을 밟은 게 십수년 만이었다. 그는 “다른 교포들은 관광하고 골프 치러 제주도에 간다지만 나는 차마 그러질 못했다. ‘아, 내 고향이다’라는 기쁜 마음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만 들었다”고 했다. 그런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카사의 재일본4·3유족회장인 오광현씨가 한 유족의 집을 찾고 있다. 허호준 기자
오카사의 재일본4·3유족회장인 오광현씨가 한 유족의 집을 찾고 있다. 허호준 기자

외아들 현승홍씨는 어머니가 무척 보고 싶었다. 신분이 안정된 외삼촌한테 어머니를 초청해달라고 부탁해 20년 만에 오사카에서 모자가 상봉했다.

“하나뿐인 아들을 일본에 보내놓고 어머니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20년 만에 뵀는데, 그사이 얼마나 고생이 심했던지 완전히 할머니가 되어버리셨더군요. 정말 효도가 필요할 때 효도를 못 했어요.”

이계순씨는 4·3 때 아버지 주검을 수습했던 숙부를 통해 4·3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됐다. 숙부는 1960년대 중반 서독 유학길에 오른 뒤 조카인 이씨와 자주 편지를 교환했다. 숙부는 편지에서 “4·3 문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진실이 밝혀지고 네 아버지도 언젠가는 명예회복이 될 것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곤 했다. 이씨가 손가방에서 국제우편 소인이 찍힌 50년도 더 된 빛바랜 편지를 꺼냈다.

“이승만 정권은 가난한 민중을 위한 정치라기보다는 그들을 착취만을 해온 정권욕의 학정였던 것 같다. 네 아버님이 돌아가신 슬픈 일도 이런 잘못된 정치적 환경에 희생되신 것으로, 가난한 민중의 정당한 권리를 찾는 옳은 죽으심이었음이 밝혀지는 날이 언젠가는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때가 아직은 먼 미래에 있을지 몰라도.”

이계순씨의 숙부가 1972년 당시 서독에서 보낸 편지에는 이씨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 있다. 허호준 기자
이계순씨의 숙부가 1972년 당시 서독에서 보낸 편지에는 이씨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 있다. 허호준 기자

1972년 11월12일 독일의 숙부는 이런 내용의 편지를 이씨에게 보냈다. 편지는 “나는 외국에 나와서 해방 직후의 남한의 정치적 발전 과정을 좀 객관적으로 역사를 더듬어 볼 수가 있었고, 특히 이승만씨가 저지른 처음부터의 과오 등도 좀 자세히 되찾아 볼 수가 있었다”고 적고 있었다.

외국인등록증을 만든 뒤 합법적으로 찾을 수 있게 된 고향 땅. 수십년 만에 돌아온 제주도는 너무나 많이 변해 있었다. 그래도 고향이었다. 돌아보고 싶지 않았으나 그래도 돌아봐야만 할 땅. 그런 고향 땅에서 부모 형제의 위패가 모셔진 4·3평화공원을 찾아 무릎을 꿇었다.

다시 4·3…마음은 제주에

“이젠 나도 일본 사람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만, 고향은 고향입니다. 고향 선흘리에서 있던 일들이 기억나요. 죽을 땐 고향 가서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지요.” 1950년대 후반 밀항선을 탔던 부시송씨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렵다고 했다.

현승홍씨는 ‘제주의 냄새’가 좋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주에 그냥 눌러사는 게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제주도 하면 돌멩이 하나, 나무 하나도 모두 생각이 납니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고향의 한라산이었고, 바다였다. 몇년 전 딸(41)과 함께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았다가 수천기에 이르는 행방불명인 표석을 보는 순간 눈물이 났다. 딸도 마음이 아파 많이 울었다.

김봉전씨는 “4·3 보상금이 나왔지만 기쁘지 않다”고 했다. 가족의 죽음으로 받은 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던 탓이다. 고민하던 그는 “자식들과 손자들까지 모두 데리고 고향에 가서 부모님 산소 앞에 무릎 꿇고 머리 숙이고 싶다”고 했다. 김씨도 딸과 함께 4·3평화공원을 방문해 행방불명인 표석에 있는 큰형과 둘째 형의 표석, 위패봉안실에 있는 부모님의 위패를 보며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계순씨. 허호준 기자
이계순씨. 허호준 기자

“4·3은 사건이 아니라 저항권입니다. 한반도에 대한 미군정의 정책, 이승만의 정책으로 제주도민이 너무나 억울하게 희생당했습니다. 이것은 사건이 아니라 애매(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권력에 대한 저항입니다.” 김대준씨는 4·3을 정치권력의 희생양이 된 제주도민들의 저항권으로 보았다. “제주 사람이라면 4·3과 관계가 있든 없든 진실을 알아야 해요. 진실을 알면 엄숙한 마음으로 제주를 찾아가야지 관광이나 재미있는 일을 찾아서 가면 안 됩니다.” 이렇게 말하는 김씨의 눈빛은 강렬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

이계순씨도 4·3 보상금을 받게 됐지만, 정말 돈을 받아도 되는지에 대해 지인들과 고민했다고 한다. “수십년이 흐른 뒤 보상금이 나왔잖아요. 그래도 어딘지 모르게 정말 맺힌 게 있습니다. 응어리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이씨는 일본 신문에 4·3 관련 기사가 나면 보고 또 본다. 그는 일본 생활 초기 재일동포 소설가 김석범이 쓴 ‘까마귀의 죽음’을 일본어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를 때 사서 읽을 정도로 4·3에 관심이 많다. “4·3은 미군정 때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조선민족(한민족)을 조금만 더 생각했으면 4·3 같은 비극이 일어났을까요? 그런데 재일동포 사회에서 이런 사실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이씨의 말에선 재일 제주인 사회에서조차 4·3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났다.

오사카/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