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당시 ‘현장 지휘관이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했을 뿐 상부의 발포명령은 없었다’는 군 당국의 지금껏 설명과 달리 ‘발포 명령 하달’이란 군 내부 문건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현장의 군인이 알아서 총을 쐈다’는 설명에 대해 군 지휘체계 특성상 누군가 발포명령을 내렸을 것이란 반론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진은 80년 5월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광주지역 관할 부대가 작성한 것으로 된 ‘광주 소요사태’라는 기밀문서. 5·18기념재단 제공
1980년 5월 당시 ‘현장 지휘관이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했을 뿐 상부의 발포명령은 없었다’는 군 당국의 지금껏 설명과 달리 ‘발포 명령 하달’이란 군 내부 문건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현장의 군인이 알아서 총을 쐈다’는 설명에 대해 군 지휘체계 특성상 누군가 발포명령을 내렸을 것이란 반론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진은 80년 5월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광주지역 관할 부대가 작성한 것으로 된 ‘광주 소요사태’라는 기밀문서. 5·18기념재단 제공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군 당국이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도록 발포 명령을 하달했다는 군 내부 기록이 처음으로 나왔다. 국회와 검찰, 국방부 등이 벌인 4차례 5·18 조사에서 ‘현장 지휘관이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했을 뿐 상부 명령에 의한 발포는 없었다’고 줄곧 주장해온 군의 주장을 뒤엎는 것이다.

24일 5·18기념재단이 확보한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505보안대(광주지역 관할 부대)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광주 소요사태’라는 기밀문서를 보면, 80년 5월20일 ‘23시15분(밤 11시15분) 전교사(전투교육사령부) 및 전남대 부근 병력에게 실탄 장전 및 유사시 발포 명령 하달(1인당 20발)’이라고 적혀 있다. 당시 전남대 부근에 주둔했던 병력은 제3공수여단(여단장 최세창)이다. 최세창 여단장(육사 13기)은 신군부 실세 전두환 보안사령관(육사 11기)이 제1공수여단장이었을 때 부단장을 지낸 측근이다.

당시 공수부대 실탄 지급 분배 사실이 확인됐고, 발포가 이뤄져 시민들이 숨졌지만 37년 넘게 발포명령자를 밝혀내지 못한 상태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기록 보고서 등을 보면,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5월20일 밤 10시30분 ‘경계용 실탄’을 위협 사격용으로 공수부대 각 대대에 지급했다. 육군본부 군사연구실이 낸 <광주사태체험수기>(1988)에도 이상휴 중령(당시 3공수여단 13대대 9지역대장)이 “전남대학교에서 급식 후 중대장 지역대장에게 M16 실탄 30발씩 주고, 사용은 여단장 통제”라는 부분이 나온다. 3공수여단은 지휘계선상 상급부대인 제2군사령부로부터 발포 금지 및 실탄 통제 지시(5월20일 밤 11시20분)가 있었는데도 발포했고, 5월20일 밤 광주 시민 4명이 총탄을 맞고 숨졌다. 다음날인 5월21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옛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선 공수부대원들의 집단발포로 시민 34명이 총을 맞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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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발포 명령자에 대해서는 “판단 불가”라며 밝히지 못했다. 정수만 5·18기념재단 비상임연구원은 “당시 신군부 실세인 보안대가 작성한 군 자료에 ‘발포명령 하달’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누가 어떻게 이런 명령을 내렸는지 발포 명령권자를 밝히는 단서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공개 문서엔 ‘마산주둔 해병 1사단 1개 대대 목포로 이동 예정’이라는 내용도 있다. 공군 조종사들이 5월21~22일 공대지 폭탄을 전투기에 싣고 광주 출격 대기중이었다는 증언에 이어 신군부가 광주 진압에 해병대까지 동원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 해병대는 광주에 투입되지 않았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