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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산이 미국산으로 둔갑…‘손기정 월계관수’ 미스터리

등록 :2021-08-19 15:57수정 :2021-08-19 22:09

[애니멀피플]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우승자 130명에 참나무 수여
손기정 월계관수만 유럽산 아닌 미국산 참나무로 판명
이선 교수 “교정 심기 전 죽어 바꿔 심었을 가능성” 제기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대에서 손기정 선수가 부상으로 받은 참나무 화분을 들고 있다. 나중에 이 사진의 일장기를 삭제한 사진을 동아일보 등에서 실어 정간사태가 났다. 오른쪽은 3위를 한 남승룡 선수이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대에서 손기정 선수가 부상으로 받은 참나무 화분을 들고 있다. 나중에 이 사진의 일장기를 삭제한 사진을 동아일보 등에서 실어 정간사태가 났다. 오른쪽은 3위를 한 남승룡 선수이다.

독일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시상식 때 금메달 수상자 130명 전원에게 월계관과 함께 화분을 선물했다. 이 화분에는 월계수가 아닌 참나무 묘목이 심어져 있었다.

독일의 힘과 환대를 상징한 이 묘목은 세계 곳곳에서 자라 ‘히틀러 참나무’ ‘올림픽 참나무’로 불린다. 이 대회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딴 손기정의 손에도 이 참나무 화분이 들려 있었고 손 씨의 모교인 양정고에서 거목으로 자랐다. 그런데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돼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로 불리는 이 참나무가 애초 손씨가 올림픽 시상식 때 받은 나무가 아니라는 주장이 나왔다.

서울 중구 손기정공원의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 한겨레 자료사진
서울 중구 손기정공원의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 한겨레 자료사진

이선 한국전통문화대 교수(식물생태학)는 ‘한국조경학회지’ 지난해 12월호에 실린 논문을 통해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여러 근거와 정황을 들어 기념물로 지정된 서울 중구 손기정공원에 있는 미국 원산의 대왕참나무는 애초 시상식 때 준 유럽 원산의 로부르참나무와 다른 종으로 나중에 무슨 이유에선가 바뀌어 심어진 나무라고 주장했다.

가장 큰 근거는 두 나무의 형태 차이다. 이 교수는 “로부르참나무는 우리나라 신갈나무처럼 잎 가장자리가 둥글둥글한 모습이지만 대왕참나무는 뾰족뾰족해 한눈에 구별된다”고 말했다. 손기정의 시상식 사진을 보아도 잎 모양은 로부르참나무에 가깝다.

유럽 원산인 로부르참나무(왼쪽)은 잎 가장자리가 둥글고 미국 원산의 대왕참나무(오른쪽)는 거칠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선 교수 제공.
유럽 원산인 로부르참나무(왼쪽)은 잎 가장자리가 둥글고 미국 원산의 대왕참나무(오른쪽)는 거칠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선 교수 제공.

이제까지 손기정 기념수가 미국산 대왕참나무인 것을 두고 ’월계수를 구할 수 없어 미국참나무를 대신 썼을 것’이라거나 ’북미에서 수입한 참나무가 잘못 섞여들었을 것’이라며 독일 쪽의 잘못 때문이란 설명이 주로 나왔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독일에는 참나무를 신성시하는 오랜 문화와 전통이 있다”며 “독일 자생 참나무를 두고 적대국이던 미국산 대왕참나무를 상으로 준다는 것은 마치 우리나라 올림픽에서 우승자에게 무궁화 대신 일본 벚나무 묘목을 수여하는 격”이라고 반박했다.

손기정 기념관에 전시 중인 손기정 월계관. 로부르참나무로 만들었다. 손기정 기념관 제공.
손기정 기념관에 전시 중인 손기정 월계관. 로부르참나무로 만들었다. 손기정 기념관 제공.

현재 전시 중인 손기정 선수의 월계관이 로부르참나무란 사실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 교수는 “월계관은 독일산 참나무로 월계수는 미국산 참나무를 수여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밝혔다. 참나무 묘목을 부상으로 주자는 아이디어는 베를린의 정원사 헤르만 로테가 낸 것으로 그는 애초 월계관 1800개의 주문만 받았지만 묘목도 함께 공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 수상자 틸리 플라이셔가 들고 있는 화분. 로부르참나무가 심겨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독일 수상자 틸리 플라이셔가 들고 있는 화분. 로부르참나무가 심겨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그렇다면 다른 나라 금메달 수상자들이 받은 묘목은 어떤 수종일까.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2014년 우승자들이 받은 참나무가 어떻게 됐는지를 추적한 기획 ‘히틀러의 올림픽 참나무’에서 수상자들이 받은 참나무가 거목으로 자란 모습을 소개했다. 이 기획에 손기정 선수는 나오지 않지만 육상 4관왕을 차지한 미국의 조지 오언이 로부르참나무 4그루 가운데 한 그루를 오하이오 로데즈 고등학교 교정에 심어 크게 자란 모습과 높이뛰기에서 우승한 코르넬리우스 존슨이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 심은 로부르참나무 거목의 모습 등을 보여준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독특한 자세로 2m 3㎝를 뛰어 우승한 코르넬리우스 존슨과 그가 코리아타운에 심은 로부르참나무. ‘슈피겔’ 제공.
베를린 올림픽에서 독특한 자세로 2m 3㎝를 뛰어 우승한 코르넬리우스 존슨과 그가 코리아타운에 심은 로부르참나무. ‘슈피겔’ 제공.

손기정 기념재단 이준승 사무총장은 이런 주장에 대해 “전문적인 내용은 잘 모르겠다”면서도 “양정고 교정에 참나무를 심은 뒤 1∼2년 지난 1939년께 찍은 사진을 보면 현재와 잎 모양이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는 “대왕참나무도 어릴 때는 잎 모양이 둥글 수 있고 자라는 곳의 습기에 따라 잎 모양이 달라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유독 손기정 선수가 받은 참나무만 미국 참나무일 가능성보다는 유럽 참나무를 받아와 심는 과정에서 죽어 미국산으로 대체했을 가능성이 더 큰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임학)는 “잎이 큰 참나무 묘목은 건조에 매우 취약하다”고 말했다. 손 선수의 귀국 길은 40일이나 걸렸다.

월계관을 쓴 손기정. 월계관과 밑에 든 화분의 참나무가 같은 로부르참나무로 보인다.
월계관을 쓴 손기정. 월계관과 밑에 든 화분의 참나무가 같은 로부르참나무로 보인다.

이 선 교수는 ‘양정고 100년사’에 실린 체육 교사 김연창이 쓴 글에 주목했다. 생물교사 김교신 선생이 손기정으로부터 묘목을 넘겨받아 식물원이 아닌 자기 집에서 겨울을 나게 했는데 이듬해 봄 “월계수가 말라 죽게 됐다”고 해 아직 살아있는 뿌리를 10㎝가량 잘라 심어 보살폈더니 살아났다는 내용이다.

박 교수는 “교정에 심은 뒤에도 해방과 한국전쟁 등 격동기가 이어져 참나무가 어떻게 죽고 누가 교체했는지 등은 추정일 뿐 정확한 실상은 알기 힘들다”며 “그렇더라도 손기정이 받은 나무와 지금의 기념수는 다른 종의 나무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고 말했다.

거목으로 자란 손기정 기념수인 대왕참나무. 그 자체로 보존가치가 크지만 역사적 사실은 밝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선 교수 제공.
거목으로 자란 손기정 기념수인 대왕참나무. 그 자체로 보존가치가 크지만 역사적 사실은 밝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선 교수 제공.

이 교수는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는 것이 고 손기정 선수의 정신을 기리는 또 다른 길이 될 것”이라며 “90살 가까운 현재의 대왕참나무는 나름의 의미와 가치가 있으니 지속해서 관리하는 한편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의 로부르참나무에서 열매를 받아 기르는 방안 등을 고려할 만하다”고 말했다.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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