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에서 가장 악명이 높았던 마크로니소스섬에 있는 정치범수용수 건물들의 흔적이 보인다. 좌파나 좌파 혐의자들로 지목된 그리스인들은 이곳에서 가혹한 고문에 시달렸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그리스에서 가장 악명이 높았던 마크로니소스섬에 있는 정치범수용수 건물들의 흔적이 보인다. 좌파나 좌파 혐의자들로 지목된 그리스인들은 이곳에서 가혹한 고문에 시달렸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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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신타그마 광장에서 제주 3·1사건을 생각한다
② 칼라브리타 학살과 북촌리 학살
③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와 ‘4·3’ 수형인들
④ 신화의 나라, 저항의 나라
⑤ 저항과 비극의 서사, 스코페프티리오
⑥ 그리스의 홀로코스트 ‘유대인 절멸’
⑦ 기아의 어머니와 절대권력의 무상
⑧ 전쟁기념관과 쓰여지지 않는 역사
⑨ 그리스의 위기…문화와 경제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기억

포세이돈 신전에서 바라본 마크로니소스섬이 아득하게 보인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포세이돈 신전에서 바라본 마크로니소스섬이 아득하게 보인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카테리니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11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내 기억 속에 남으리….”

‘기차는 8시에 떠나네’(To treno fevgl stis okto)를 작곡한 세계적인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87). 애잔하고 비장감 어린 이 노래의 선율은 그리스의 우울한 색채를 드러내는 듯하다. 그는 2004년 여름 그리스 언론 <엘레우테로티피아>와의 인터뷰에서 “지금도 마크로니소스를 생각하면 여전히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흐른다”고 토로했다.

그는 독일군 점령 시기인 1943년 청년 빨치산(민족인민해방군)으로 활동했고, 군부독재 기간인 이른바 ‘대령들의 정권’(1967~74) 시기까지 투옥과 석방, 망명생활을 거듭했다. 그리스의 악명높은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되기도 했던 ‘행동하는 저항음악가’이다.

그리스 내전 시기 체포된 그는 에게해의 이카리아섬으로 추방된 뒤 마크로니소스섬으로 이송됐다. 그러나 그에게 마크로니소스섬은 ‘악몽의 섬’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심하게 고문당했고, 2차례나 생매장당할 뻔했다. 척추가 부러지고 턱이 탈구돼 아테네의 군병원으로 후송됐다가 어느정도 상태가 호전되자 다시 마크로니소스로 되돌아왔다.

또다시 이어진 고문 속에, 1949년 8월 좌파 민족인민해방군의 후신인 ‘그리스 민주군대’의 패배 이후 부친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석방됐다. 이후 10여년 동안 잠을 자다가 한밤중에 식은땀과 공포로 옷이 흠뻑 젖어 깨어나곤 했다고 말했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공포스러웠길래 긴 세월동안 그곳에서의 기억이 지워질 수 없었던 걸까?

그리스의 세계적인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출처: 위키피디아
그리스의 세계적인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출처: 위키피디아

그가 수용됐던 에게해의 마크로니소스섬은 아티카 지방의 해안에 가까운 곳에 있다.

기자는 그리스에 오기 전부터 그곳에 가고 싶었다. 아테네의 니키스거리에 있는 아카데미여행사라는 곳을 찾았다. 여행사 앞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관광객을 호객하는 이 여행사 직원 브랑코 마사일로비치에게 물었다. 다가가자 부채를 부치던 그가 환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마크로니소스 섬으로 가는 여행상품은 없나요?”

갑자기 그의 안색이 변했다. “어디라고 했어요?”

“마크로니소스!”

갑자기 그가 결박당한 자처럼 양손을 묶은 채 뒤뚱거리는 시늉을 하면서 말한다. “마크로니소스는 이런 곳이에요. 왜 거기 가려고 해요?” 되레 이상하다는 듯 투다. “그곳에 가는 여행상품은 없어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에요.”

다른 곳에 가서 알아보라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몇 곳의 여행사를 들러봤다.

그곳에 가는 배편은 없었다. 지도를 보니 수니온곶에 가면 마크로니소스섬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스와 제주의 운명이 그래서 닮았던 걸까? 그리스도 제주도처럼 빼어난 절경지나 유명한 관광지는 역사적 상흔을 안고 있다. 아테네에서 사로닉만을 따라 수니온으로 가는 길에 협죽도, 소철, 측백나무가 곳곳에 보였다.

개인주택 정원에는 용설란도 보였다. 와싱토니아 야자는 제주도에 있는 것처럼 가늘고 길쭉하다. 제주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나무들이어서 낯설지 않았다. 데켐브리아나(해방 이후인 1944년 12월 아테네에서 벌어진 전투) 이후 좌파 민족해방전선·민족인민해방군과 그리스 정부가 바르키자협정을 체결했던 바르키자마을도 지났다. 해수욕장이 끝없이 이어진다. 급경사면을 깎고 개설된 도로는 아슬아슬하다.

멀리서 바닷가 쪽으로 툭 튀어나온 곳에 우뚝 솟은 신전이 보였다. 버스로 2시간 걸려 아티카 반도의 끝 수니온곶에 도착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봉헌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포세이돈 신전을 잠깐 들렀다. 바람이 거세다.

수니온곶에 있는 카페를 찾아 종업원에게 물었다. 신전을 구경하는 사람보다 바닷가를 배경으로 카페에서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무뚝뚝하게 보이는 종업원이 메뉴판을 들고오자 “마크로니소스 섬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 종업원, “저게 마크로니소스섬이요”라고 말한다.

아, 바로 그 섬, 그리스에서 가장 악명 높았다는 정치범수용소가 눈 앞에 있다. 카페에서 일어나 마크로니소스를 가깝게 보려고 절벽 위까지 갔다. 멀리 무인도처럼 보이는 섬이다. 카메라를 들이대니 그 섬 안의 건물들이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마크로니소스는 남북 길이 10㎞, 동서 너비 500m인 긴 섬이다.

군·경은 1948~49년 체포되거나 귀순한 제주도민들을 이곳 제주주정공장에 수용했다. 일제 강점기 때 동양척식회사가 제주도민들을 수탈했던 이 장소에서
군·경은 1948~49년 체포되거나 귀순한 제주도민들을 이곳 제주주정공장에 수용했다. 일제 강점기 때 동양척식회사가 제주도민들을 수탈했던 이 장소에서

그리스 내전과 정치범수용소 독일군 점령 시기 결성된 그리스의 저항조직은 좌파 민족해방전선·민족인민해방군과 우파 민족사회해방이 양대 축을 이뤘다. 이들은 처음부터 이데올로기의 커다란 차이를 보였고, 1943년부터 직접 충돌함으로써 사실상 내전을 시작했다. 이어 1944년 10월 독일군이 철수한 뒤 민족민족해방전선·민족인민해방군 대 정부와 우익 군사단체의 갈등이 같은 해 12월3일 경찰의 비무장 시위대에 대한 발포를 계기로 무력충돌로 번졌다. 영국군의 적극 개입으로 좌파진영은 1945년 2월 패배했으며, 정부-우익단체의 백색테러가 자행되면서 내전은 가속화됐다. 그리스의 후견국인 영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국력이 쇠퇴하면서 미국에 개입을 요청했고, 미국은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을 계기로 내전에 적극 개입했다.

1948년 2월 그리스 주둔 미합동군사고문단장으로 임명된 밴 플리트 장군이 도착한 뒤 북부와 중부 산간지대에서 대대적인 정부군의 공세가 시작됐다. 네이팜탄까지 동원됐다. 1949년 10월 그리스 민주군대는 종전을 선언함으로써 사실상 패배를 인정했다.

1947년 2월19일, 막시모스 정부는 마크로니소스섬, 기우라섬, 트리케리섬 등 3곳에 정치범수용소를 설치했다. 내전이 한창이던 1947년 한해에만 1만명 이상의 좌익 혐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을 체포해 본토는 물론 섬지역의 수용소에 수감했다. 마크로니소스섬 수용소는 수감자들에 대한 ‘계몽과 교육을 통한 갱생’을 목적을 내세웠다.

그러나 “수감자들을 민족주의자이며 충성스런 그리스 국민으로 만들겠다”는 ‘갱생’은 고문과 강제노동, 독방구금, 비참한 생활 등을 의미했다. 10여명 수용할 수 있는 텐트에는 실제로 30~50여명을 수용했다.

마크로니소스섬에는 공산주의 신념을 소지한 혐의를 받는 징집된 군인들을, 트리케리섬에는 정부군이 소탕한 지역의 ‘의심스러운’ 주민들, 특히 여성과 아동들을 수용했으며, 기우라섬에는 범법자들을 수용했다. 그러나 독일군에 저항했던 저항단체의 조직원, 아버지가 민주군대에 가담하거나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투옥된 자들의 14~18살 자녀들도 기우라섬에 수용됐다. 산간마을의 한 촌장은 마을을 통과한 게릴라들에게 식량과 피신처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군법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용소에 수용되기도 했다.

마크로니소스섬 수용소는 1958년까지 사용됐다. 섬에 수용된 정치범들은 날마다 고문과 폭행에 시달리고 반성문 작성을 강요당했으며, 공산주의를 공개비판하는 전향선언을 해야 했다. 일부 수감자들은 동료 수감자들을 폭행하도록 하는 고문을 강요받기도 했다. 1947~1950년 1110명의 장교와 2만7770명의 병사들이 마크로니소스에 수감됐는데, 좌익은 이곳을 나치의 다카우수용소에 빗대어 ‘신 다카우수용소’라고 불렀다.

내전 이후 많은 그리스의 문인들은 마크로니소스섬에 대한 글을 썼다. 야니스 리초스, 아리스 알렉산드루, 타소스 레이바디티스, 티토스 파트리키오스,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등은 머리 속에 기억으로 시를 남기거나 깨알 같은 글씨로 종이에 써 병 같은 것에 숨기는 등 문학에의 열정을 놓지 않았다.

 4·3 때는 한국 군·경이 수용소로 바꿔 또다른 형태로 제주도민들을 괴롭혔다. 4·3 당시 이곳에 감금됐던 수천여명의 도민들은 폭력에 시달리다가 형식적인 재판을 거친 채 육지형무소로 이송됐으며
4·3 때는 한국 군·경이 수용소로 바꿔 또다른 형태로 제주도민들을 괴롭혔다. 4·3 당시 이곳에 감금됐던 수천여명의 도민들은 폭력에 시달리다가 형식적인 재판을 거친 채 육지형무소로 이송됐으며

무덤에서 살아나온 ‘4·3 수형인’ 마크로니소스섬에 수용됐던 그리스인들은 가혹했던 나치 독일의 점령에서 벗어나면 희망의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리라. 신념이란 무엇인가? 아니면 아무것도 모른 채 어느 날 ‘빨갱이’로 둔갑돼 저곳까지 가게 된 것일까? 그들은 나치 점령 당시 동료들을 고문하고 학살한 친독협력자들이 해방 이후 아테네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웠으리라.

나뭇가지가 흔들릴 정도로 바람이 거센 수니온곶에서 마크로니소스를 바라보았다. 섬에서 고문당하고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그리스인들은 포세이돈 신전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들은 신을 믿었을까. 포세이돈이 삼지창을 던져 바닷길을 열기를 기대하지는 않았을까.

제주 4·3을 전후한 시기 육지의 형무소로 수많은 제주 사람들이 적법한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끌려갔다. 그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살기 위해 산으로 피신했다가 귀순한 뒤 억류되고 고문받아 공산주의자로 둔갑됐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다. 그렇게 다른 지방 형무소로 간 제주도민은 2500여명 이상이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10여년 전 인터뷰했던 어떤 이는 4·3 당시 자신이 살던 중산간 마을이 소개되자 1948년 11월 해안마을로 내려왔다. 그는 그곳에서 불순분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우익 청년단원들이 지목한 소개민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보고 1949년 1월 가족들을 데리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피난생활을 하다 같은해 4월 ‘귀순’했다.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해안마을이 불타는 것을 봤다는 게 이유였다. 형무소에 도착하고서도 보름이나 지난 뒤 15년형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간수로부터 “너희는 징역 15년이다”라는 소리를 듣고는 좌절했다.

일제 강점기 때 강제징병돼 일본에서 미군의 공습을 피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고향에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피난생활을 하다 공산주의자로 둔갑한 것이었다. 그는 형무소에서 옆에서 동료가 죽어도 간수에게 얘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그 사람에게 배급될 식사라도 더 받아내려고 그렇게 했다고 한다.

많은 제주도민들이 육지 형무소로 끌려갔지만, 고향에서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예비검속 명목으로 집단처형됐다. 그 속에서 운이 좋은 사람들은 천운으로 살아나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제주 4·3 연구가들은 이들을 ‘무덤에서 살아난 4·3 수형인들’이라고 한다.

제주 4·3 당시 육지 형무소들은 또다른 마크로니소스섬이었다. 마크로니소스섬에서 그리스의 이른바 ‘정치범’이 강제노동과 고문을 당하고 죽어간 그 시간, 우리나라의 육지형무소에서 수감된 ‘4·3 수형인’들도 비슷한 경로를 밟았다.

수니온곶(그리스)/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