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11일, 황민준(가명·33)에게서 다시 카카오톡으로 연락이 왔다.
만난 지 9개월 만에 헤어진 전 남자친구다.
그는 나와 사귀면서 내게 지나치게 집착했다.
2016년 2월 말부터 우리 관계에 대해 고민을 했던 이유다.
그는 9일 전인 3월2일에도 나를 불러냈었다.
꼭 오늘 만나야 한다고 했다.
며칠 전 빌려간 돈 340만원도 돌려주겠다며 졸라댔다.
평소와 다름없는 다정한 말투였다.
그날 밤, 그는 나를 차에 태우고 잠실대교 위에 데려가서 이렇게 말했다.
나랑 헤어지려 하는 것을 알고 있어.
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죽이려고 했는데,
죽이지는 못하고 다리만 부러뜨렸지.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을 거야.
나는 네가 사는 곳도 알고 가족도 알고 있고
네 직장은 물론이고 엄마 미용실이 어딘지도 알고 있어.
나한테 헤어지자고 하면 너를 포함해 네 가족까지 죽일 거야.
만약을 위해 동영상이 들어 있는 USB도 준비했어.
나를 신고하거나 내가 잘못되면
미국의 동생에게 USB 내용을 공개하라고 지시했어.
몇 시간 전까지 “빨리 보고 싶다”던 그가 순식간에 얼굴을 바꿨다.
나를 “이봐요”라고 부르며 협박했다.
말뿐만이 아니었다. 폭행도 했다.
넘어뜨리고, 밟았다. 자기 입으로 “다신 보지 말자”고 했다.
그날 이후 나는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큰 소리만 들려도 바닥에 주저앉았다.
엄마가 그런 나를 알아챘고, 아빠도 이내 알게 됐다.
3월11일은, 그랬던 그가 9일 만에 내게 다시 연락한 날이었다.
“벌써 다리에 힘이 풀려서, 만나기는 힘들 것 같다”는 내 말에 그가 대뜸 말했다.
“더 나쁜 생각을 할 것 같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11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울면서 “다시 만나자”고 했다.
나는 “무서워서 안 된다”고 했다.
다음날 그는 집과 회사로 무작정 찾아왔다.
“죽을 것 같아서 왔다”고 했다.
그날 오후에는 위암 투병으로 집에 계신 아빠한테 찾아가 무릎을 꿇고 빌었다.
아빠는 “내 딸은 마음이 떠난 것 같다. 너도 마음 접고 새 출발 해야지”라고 달랬다.
그는 부모님이 3월2일의 일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참지 못했다.
12일 오후 통화에서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 왜 얘기를 하는 거야”라며 날 몰아붙였다.
그러면서 “내가 막 죽이겠다고 한 이야기도 (부모님께 얘기)한 거야”라며 날 떠봤다.
부모님께 그런 얘긴 할 수 없었다. 그런 나쁜 얘기까진.
날 때렸다는 이야기도 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15일 그에게서 또 카톡이 왔다.
출근을 시켜주겠다고 한다.
이미 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퇴근길에도 “집에 바래다주는 거 불편할까?” 또 연락이 왔다.
선약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언제나 그렇게 일방적이었다.
그러면서 내게 “너무 휘둘린다고 생각하지 마”라고 했다.
“솔직히 나를 너무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나를 위해준다는 생각보다 하고 싶은 대로 하려는 것 같다. 나 때문에 죽는다느니 이런 얘기는 안 했으면 좋겠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그날, 나는 그의 차 안에서 칼을 봤다.
잠실대교에서의 일이 떠올라 너무 무서웠다.
17일 우리는 경복궁에서 만났다.
헤어지기 전에 표를 사둔 것을 이야기하며 그가 ‘제발 한 번만 같이 가달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 가는 길 차 안에서 그는 내게 재결합을 요구했다.
나는 다시 거절했다.
“놔달라”는 내 말에 그는 “너무 억울하다”고 했다.
18일 새벽 내내 이어진 전화에서 그의 말은 더욱 거칠어졌다.
“부럽다. 나 자신을 위해서 죽겠다는 사람이 있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거야.”
“정은아, 넌 이걸 협박으로 듣겠지만 네가 나를 구원해주지 않아도 넌 행복해질 수 없어.”
“나는 지금 네가 죽었다고 생각해, 나도 죽었고.”
“넌 절대 행복하지 못해.”
그날뿐이 아니다.
3월23일 카카오톡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나는 그와 연락을 끊었다.
제발 헤어짐을 인정하고 마음을 추스르라고 했다.
“잘 있어요, 내 사랑.”
그의 마지막 메시지에 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1주일에 4~5일은 그의 차가 아파트 앞에 있었다.
만약 그가 차 안에 없다면 그건 근처 건물에 올라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빠와 동생이 번갈아가며 나의 출퇴근길을 챙겼다.
4월8일까지 그런 날의 연속이었다.
19일부터 마지막으로 연락한 23일까지 그와 나의 대화는 도무지 접점을 찾을 수 없는 평행선 위에 있었다.
그는 내게 “불행해도 만나주면 안 돼?”
“나는 끝을 봐야겠어.”
“사랑 아니어도 상관없어.”
라고 말하며 계속 재결합을 요구했다.
자살 협박은 나와 주변을 향한 협박으로 이어졌다.
“19일에 진짜 죽으려고 목을 막 찌르는데 너무 무서웠다.”
“그런데 그냥 (혼자) 죽기에는 너무 아까울 것 같아. 그 전 사람들을 다 죽이기로 생각했거든 솔직히? 그런데 나는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니야.”
“귀신이 되고 싶어, 귀신이.”
아빠는 위암 투병으로 건강이 좋지 않다.
그런데 그의 스토킹이 시작되고 나서 좋아하던 자전거 운동마저 끊었다.
늘 그가 우리 주변에 있는지 확인해야 했으니까.
한동안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빠의 건강이 걱정되어서 말했다.
“이제 걔도 생각을 바꿨나봐. 아빠 운동 나가.”
선뜻 내키지 않아하던 아빠는 4월19일 아침, 출근 준비를 하는 나를 집에 혼자 두고 자전거를 옆에 낀 채 운동을 하러 나섰다.
그리고 그날 낮 12시, 나는 전 남자친구의 흉기에 찔려 우리 집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안 그래도 왜소한 딸이 자꾸 살이 빠졌다.
딸은 처음에 엄마한테만 말한 모양이다.
안 그래도 암 수술을 하고 몸관리하는 아빠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겠지.
난 아빠 자격도 없다.
딸이 회사에서 새 일을 맡아서 힘든 줄로만 알았다.
처음 그놈이 딸에게 한 짓을 들었을 때, 나는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그땐 스토킹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몰랐으니까.
난 딸을 안심시키기에 바빴다.
“정은아 걱정하지 마, 너 겁주려고 그러는 거야.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갈 거야.”
나중에 딸이 내게 말했다.
“아빠, 그게 아니야.”
내가 안이하게 착각했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때부터 딸 출퇴근길을 챙기기 시작했다.
집 앞에 상주하는 그놈 차를 주시하면서.
온 가족이 모여 ‘대책 회의’를 연 것도 여러 번이었다.
친구들한테도 딸 이야기를 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결론은 ‘경찰에 신고하지 말자’였다.
스토킹, 그거 신고하면 그놈을 잡아가나? 가끔 가다 순찰은 돌겠지.
내 딸을 24시간 보호해주지도 못하잖아.
법은 물렁하고, 신고했다가 괜히 그놈의 신경만 건드릴 것 같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놈은 딸이 엄마 아빠한테 스토킹을 알렸다고, 그걸 가지고도 괴롭혔던 놈이다.
나는 딸을 출퇴근시키면서 어떻게든 딸을 지키려고 했다.
딸이 죽은 날은 그놈이 그러고 나서 처음으로 운동 나간 날이었다.
추측이지만, 어디서 계속 지켜본 게 틀림없다.
신고하지 않은 걸 후회하냐고?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경찰에 신고했어도 내 딸은 당했을 테니까.
재판정에 선 그놈을 바라봤다.
그놈은 끝내 우리에게 사과 한마디 없었다.
그놈이 내 딸을 사랑했노라고 했다.
자신이 한 행동은 협박도 스토킹도 아닌 “관계 회복을 위한 노력”이라고 주장했다.
내 딸을 죽인 것 역시 내 딸이 갑자기 집 밖으로 도망가자 흥분한 상태에서 죽이게 됐노라고, 우발적이었다고 말이다.
심지어는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만나려고 하여 자신을 화나게 했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놈이 계획적으로 내 딸을 죽이려고 한 것은 명백했다.
그놈은 이미 사건 3주 전에 손잡이를 감은 회칼과 염산이 든 박카스병 등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유서에는 딸을 죽이고 자신도 죽겠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스토킹이 없었다니.
딸은 어떤 예감을 했던 게 틀림없다.
그놈이 다시 연락해온 뒤부터 꾸준히 그놈과의 전화 통화를 녹음해 두었다.
나 역시 딸이 죽고서야 그 녹음 파일을 들었다.
거기엔 협박과 폭행을 입증할 그놈의 목소리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놈의 변호인들은 되레 내 딸이 그놈과 주고받은 카카오톡과 전화 통화 내용을 가지고 반박을 해왔다.
왜 먼저 연락을 했어? 왜 다시 만났어?
잠실대교에서 “죽이겠다”는 협박을 듣고도?
끝없는 의심이 이어졌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한테 당했다면 이런 의심을 안 받지 않았을까.
판결문은 이렇게 썼다.
‘피해자는 피고인과 헤어지자고 한 순간부터 살해될 때까지
피고인으로부터 온갖 협박과 스토킹에 시달리다가
피고인으로부터 당할까봐 불안해하던 가장 극단적인 피해를 당하고 말았다.’
그놈 부모의 얼굴은 아직도 모른다.
내 새끼가 그랬다면 머리가 부서지도록 사과할 텐데.
난 스토킹 살인 유가족 가운데 언론 인터뷰에 많이 응한 편이다.
나도 이제 다 지난 이야기 다시 끄집어내는 게 싫다.
내 말이 신문에 한줄 나오고, 티브이에 나온다고 세상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도 아니고.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스토킹이 얼마나 무서운 범죄인지, 그놈이 절대 멈추지 않을 거라는 걸 몰라서 딸을 잃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딸이 똑같이 당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또 이렇게 기자 앞에 섰다.
남자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자기 행동을 스토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문제다.
상대방이 원치 않는데 관계 회복을 하자? 그게 바로 스토킹이다.
여성들에게도 말하고 싶다.
무조건 처음부터 알려야 한다.
가족한테든 친구들한테든.
그놈이 처음부터 정은이를 몰아붙였던 것도 주변에 알리지 말라는 거였다.
내 딸은 부모가 신경쓸까봐 차마 그놈한테 맞은 건 얘기도 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때 내가 그놈이 때린 것만 알았어도…
최근에야 이사를 했다.
딸이 죽은 자리를 지나쳐야 했던 시간만 1년6개월.
어느새 소문이 나서 집이 나가질 않았기 때문이다.
방 3개 중에 하나는 딸 방으로 내줬다.
침대, 화장대, 딸이 취미로 조립하던 프라모델, 모자 등 위치만 바뀌었을 뿐 그대로다.
겨울에는 침대에 극세사 이불을 덮어뒀다.
매일 딸 방을 청소하는데, 가끔씩 침대에 누워본다.
나는 딸한테 “정은아, 넌 시집 늦게 가라, 서른 셋이나 돼서. 아빠하고 오래 살게”라고 말하곤 했다.
그때마다 딸은 “그래 아빠, 우리 같이 오래 살자”고 했다.
가족끼리 반지도 맞췄다.
아들과 며느리까지 해서 모두 4개.
‘KIM JEONG EUN’ 딸의 영문 이니셜을 새겼다.
“목걸이로 만들든 손가락에 끼든 몸에서 절대 빼지 말자” 다 같이 약속했다.
딸은 아직 해지하지 못한 휴대전화와 함께 내 왼손 넷째 손가락에 남았다.
나의 일상은 단순하다.
매일 딸의 방을 청소하고, 매주 일요일 딸이 있는 납골당에 간다.
한 달에 한 번은 예전 동네를 찾아가본다.
딸이 죽었던 바로 그 자리에.
지금도 딸이 흘린 핏자국이 남아 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간다. 아무 의미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