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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뱀마저 침대처럼 편히 눕는 왕고들빼기

등록 :2021-01-04 08:26수정 :2021-01-04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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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당 일기 15: 왕고들빼기

필자인 고진하 목사 사인의 부인 권포근 야생초요리가가 만든 왕고들빼기 전.
필자인 고진하 목사 사인의 부인 권포근 야생초요리가가 만든 왕고들빼기 전.

지난여름, 장마가 끝난 뒤 오랜만에 볕이 쨍쨍 났다. 나는 점심때 요리해 먹을 풀을 뜯으러 뒤란으로 돌아갔다. 뒤란이 넓지는 않지만 우리 식구들이 뜯어먹을 풀들은 넉넉한 편이다. 오죽하면 아내가 뒤란을 장터라 불렀을까. 돈 한 푼 안 들이고 먹거리를 구할 수 있는 장터. 난 풀들이 널려 있는 뒤란에서 민들레와 질경이, 개망초, 왕고들빼기 등을 뜯어 잡초비빔밥을 해먹을 생각이었다.

나는 먼저 대추나무 옆에 우뚝 자란 왕고들빼기를 뜯으려 다가갔다. 왕고들빼기는 거름이 좋아서 그런지 내 키보다 더 크게 자랐다. 손을 뻗어 넓적넓적한 잎을 뜯으려고 하는데, 왕고들빼기 잎줄기 위에 뭔가 구불구불한 게 똬리를 틀고 있었다. 설마, 뱀?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는데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깜짝 놀란 나는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 순간 나는 삽을 가져와 놈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아내가 워낙 뱀을 싫어하니까. 삽이 있는 헛간으로 종종걸음을 하다가 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돌아서서 왕고들빼기 위에 똬리를 튼 뱀을 다시 보았다. 자기를 해칠지도 모를 존재가 가까이 있음을 분명 감지했을 텐데도 녀석은 미동도 않고 볕을 즐기고 있었다.

“그래, 젖은 몸을 말리려고 왕고들빼기를 침대 삼아 누워 있구나!”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는 녀석을 한참 지켜보았다. 가시도 털도 없는 폭신한 풀 침대에 똬리를 틀고 있는 꽃뱀. 그런데 문득 붉은 무늬를 지닌 꽃뱀이 왕고들빼기의 꽃처럼 보였다. 왕고들빼기의 꽃말이 ‘모정’(母情)인데, 그 꽃말에 대한 기억 때문일까. 꽃뱀은 어미 같은 왕고들빼기의 너른 품에 안겨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둘이 하나로 된 이 환한 풍경 앞에 조금 전까지 휘두르려 했던 마음속 흉기까지 던져버렸다. 식물은 태양에너지를 이용하여 물질과 에너지를 생성하고, 동물은 식물이 생성하는 물질과 에너지를 사용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 뜨거운 여름 태양 아래 있는 왕고들빼기는 태양에게 의존하고, 꽃뱀은 왕고들빼기에 의존하여 서로 공생의 순간을 누리고 있는 것. 나는 놈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멀찌감치 돌아가서 요리에 쓸 다른 풀들을 채취했다.

왕고들빼기
왕고들빼기

해넘이한해살이 식물인 왕고들빼기. 우리 가족이 여름에 가장 많이 뜯어먹는 풀. 국화과의 왕고들빼기는 유럽 원산의 재배종 상추(Lactuca sativa)와 같은 속인데, 한자 이름으로는 산와거(山莴苣), ‘야생에서 나는 상추 종류’란 뜻이다. 일찍부터 우리가 즐겨 먹어온 상추가 우리나라에 소개되기 전에는 왕고들빼기가 상추를 대신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한다. 이 풀은 개마고원 이남의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하는데, 시골의 들판, 길가, 덤불 초지, 숲 가장자리, 휴경 밭, 제방 등 양지바른 곳에 자생한다.

왕고들빼기는 한해살이 식물 중에 가장 키가 큰 꺽다리. 무려 2m까지 쑥쑥 자란다. 그래서일까. 줄기를 잘라보면 속이 비어 있어 덩치에 비해 가벼운 편. 비옥하고 적당한 습기가 있는 땅이라면 뿌리 또한 엄청 크게 자란다. 이른 봄부터 왕성하게 광합성을 해서 뿌리에 영양분을 잔뜩 저장해 여름이 되면 크게 성장할 준비를 하는 것이리.

늦여름에 건강한 꽃이 필 때면, 뿌리에서 돋아났던 잎[根生葉]들은 고사해버리고, 줄기에서 난 잎[莖生葉]들로만 살아간다. 왕고들빼기는 키가 크면서 끝에는 새순이 항상 올라오기 때문에 끝을 꺾어주면 가지를 쳐서 여러 가지가 올라와 봄부터 가을까지 올라오는 잎을 계속 뜯어 먹을 수 있다. 꽃은 7∼10월에 피고 두화는 원추꽃차례에 달리고 꽃 색상은 연노랑색이다. 두화(頭花)는 지름 2cm 정도이고 총포는 밑부분이 굵어지며 안쪽 포편은 8개 내외이다. 열매는 수과(瘦果)로 뿌리가 있고 깃털은 흰색이다.

필자인 고진하 목사 사인의 부인 권포근 야생초요리가가 만든 왕고들빼기 겉절이
필자인 고진하 목사 사인의 부인 권포근 야생초요리가가 만든 왕고들빼기 겉절이

왕고들빼기는 제 몸에 상처가 나면 쓴맛이 나는 젖 같은 흰 유액을 흘린다. 하늘을 날아가던 새들이 찍 갈겨놓은 흰 새똥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사는 강원도나 충청도 지방에서는 왕고들빼기를 ‘새똥’이라 부른다. 이름 이야기가 나온 김에 왕고들빼기와 고들빼기가 어떻게 비슷한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지 정리하고 넘어가자. 왕고들빼기는 ‘아주 큰 고들빼기’라는 의미가 되겠으나, 우리가 즐겨 먹어온 고들빼기라는 종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본래 고들빼기란 말은 ‘고돌비’에서 유래하며, 그 어원은 ‘아주 쓴(苦) 뿌리(葖) 나물(菜)’이라는 의미를 지닌 ‘고돌채(苦葖菜)’로, 지금도 만주지역에서는 그렇게 쓴다고 한다. 왕고들빼기도 약간 쌉싸름하지만, 고들빼기만큼 쓰지는 않다. 그래서 고들빼기처럼 물에 우려서 쓴맛을 빼고 요리할 필요는 없다. 하여간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고들빼기처럼 잎과 뿌리를 이용해 김치를 담가 먹었던 식물들을 모두 비슷한 이름으로 불렀던 모양이다.

왕고들빼기는 흔하디흔한 식물이라 여전히 잡초 취급을 받지만, 뛰어난 약성을 지닌 소중한 식물이다. 약으로 쓸 때는 전초를 채취하여 깨끗이 씻어 햇빛에 말려 사용한다. 왕고들빼기는 편도선염, 자궁염, 인후염, 유선염 등 각종 염증에 효험이 있으며, 특히 소화불량에 큰 도움을 준다. 장이 불편한 분들에게 권할 만한 약초이다. 앞서 간략히 언급했지만, 잎이나 줄기를 꺾으면 하얀 진액이 흘러나오는데, 이 진액은 사포닌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 항암작용을 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런 약성을 알고 난 뒤 우리 가족은 봄부터 가을까지 왕고들빼기로 다양한 요리를 해 먹는다. 가장 많이 해 먹는 요리는 왕고들빼기 주스. 요리하기도 어렵지 않은데, 어린잎을 뜯어 깨끗이 씻은 뒤 껍질을 벗긴 사과와 함께 믹서기로 갈아주면 끝. 속이 더부룩할 때 이 주스를 마시면 금방 속이 편안해진다. 왕고들빼기 겉절이도 자주 해 먹는데, 배탈이 나거나 입맛이 없는 여름철에 요리해 먹으면 달아났던 입맛도 돌아온다. 상추 겉절이를 할 때와 같은 양념으로 요리하면 된다. 왕고들빼기 잎을 뜯어다 살짝 데쳐서 하는 요리도 있다. 데친 잎을 꾹 짜 물기를 제거하고 간장이나 된장으로 무치면 된다. 밀가루나 튀김가루를 입혀 전을 부쳐도 고소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왕고들빼기의 쌉싸름한 맛을 좋아하면 잎을 깨끗이 씻어서 상추처럼 쌈을 싸서 먹어도 좋다.

필자인 고진하 목사 사인의 부인 권포근 야생초요리가가 만든 왕고들빼기 무침
필자인 고진하 목사 사인의 부인 권포근 야생초요리가가 만든 왕고들빼기 무침

지난해 늦가을 우리는 뒤란 텃밭에 왕고들빼기 씨앗을 뿌렸다. 들녘에 핀 왕고들빼기를 뜯어먹을 수도 있지만 식구들이 워낙 왕고들빼기를 좋아해 가을에 씨앗이 받아두었다가 일부러 뿌린 것. 왕고들빼기 씨앗은 받기가 쉽지 않다. 씨앗이 여물면 씨앗을 감싼 깃털들이 바람에 날려가 버리기 때문에 채종 시기를 놓치면 씨앗을 받을 수 없다. 하여간 우리가 심은 왕고들빼기 씨앗은 곧 싹이 터 조금 자라다가 날씨가 추워지면 붉은빛 잎으로 땅에 찰싹 달라붙어 겨울을 난 뒤 봄을 맞이할 것이다. 뒤란 텃밭에 씨앗을 뿌리고 돌아서는데, 아내가 뜨거운 생강차를 타 가지고 나와 건네주며 말했다.

“우리 부자인 거 맞죠?”

아내는 가끔 뚱딴지같은 질문으로 나를 놀라게 한다.

“잉, 부자라니?”

“당신이 왕고들빼기 씨앗을 뿌렸으니, 우리가 꺼내 쓸 수 있는 은행 잔고가 더 늘어난 거잖아요?”

“히힛, 그런가?”

하루하루 사는 게 힘든 형편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아내의 말이 고마웠다. 불편당 뒤란에 뿌린 씨앗을 내년 봄에 잘 거둘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하늘이 거둠을 허락하신다면, 우리 식구들은 그분이 허락한 선물을 건강한 먹거리로 활용할 수 있으리라. 데이빗 소로우는 하늘이 선사하는 대자연의 선물을 소유로 여기지 말고 향유하라고 했던가. 그렇다. 나는 불편당에 깃든 식물들에 기대어 그 선물을 흠뻑 향유하리라.

우리 집 뒤란에는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보물들이 많다네

돌담의 반짝이는 돌들도 보물이지만

초록초록 돌담을 타고 올라

환하게 웃음 짓는 풀꽃-보석들도 있다네

새싹이 돋는 봄부터 가을까지

태양과 바람, 구름과 비와

흙의 기운을 받아 쑥쑥 자란 풀들

우리 식구들은 양식을 얻기 위해

아플 때 먹을 약초를 구하기 위해

뒤란으로 돌아가며

새들처럼 휘리리 휘리리 휘파람을 분다네

그렇게 뒤란을 들고나며 캔

영(靈)의 보석들도 있는데,

우리는 풀꽃들과 대화하는 법을 익혔고

나비나 벌들의 언어를 알아차렸고

손을 내밀면 우리 가슴에 날아와 둥지를 트는

새들에게서 최상의 인간으로 성장하는 법을 배웠다네

우리 집 뒤란은

우주의 먼지만큼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우리는 거기서

우주의 꽃으로 사는 법을 터득했다네

-<뒤란을 기리는 노래>

글 고진하 목사 시인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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