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10번출구’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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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라는 이유로 살해당하는 남자는 없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하는 여성은 존재한다”

2016년 5월17일, 서울 강남역 인근 건물에서 한 여성이 살해당했다. 범인은 “여성들에게 무시를 당해 범행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여성은 범인과 일면식도 없었다. 우연히, 그날 밤, 그 자리에 있다가 단지 ‘여성’이란 이유로 범행 대상이 됐다.

그 날 이후 강남역 10번 출구에 포스트잇이 붙기 시작했다. 희생자를 추모하면서 여성 혐오를 반대하는 글들이 적혔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묻지마 살인’이 아니라 ‘여성 혐오’ 살인이다” “여자여서 죽였다” “살고 싶어요”…. 3만5천여장의 포스트잇엔 슬픔과 분노가 서렸다. 포스트잇을 적은 수많은 여성들은 여성 혐오가 실제로 존재함을 자기 삶으로 증명해 보였다. 거리, 직장, 집, 화장실 등 모든 곳이 여성들에겐 ‘강남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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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女주세요, 넌 살아男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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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10번 출구에서 한국 사회의 여성 혐오에 대한 문제의식이 한꺼번에 표출됐다. 포스트잇엔 “고인의 명복을 비는” 추모,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는 자조, “화장실도 두려워 못가겠다”는 공포, “여성 혐오를 부정하는 눈뜬 장님들”에 대한 분노 등이 새겨졌다. “여자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라” “생존 아닌 삶을 달라” “위험한 ‘밤’에 나가는 ‘내’ 잘못이 아냐. ‘위험한’ 밤을 만든 ‘니’ 잘못이라고” “여성 혐오를 멈춰 주세요. 공감할 수 없다면 침묵이라도 해주세요” 등의 절박한 외침이 이어졌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여성 혐오 사건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 동네에서 맘 편히 밥도 못 먹고
강남역 살인사건이 벌어진 지 불과 닷새 만인 지난해 5월21일, 전남의 한 섬에서 학부모 박아무개(50)·김아무개(39)씨, 주민 이아무개(35)씨 등 남성 3명이 여성 초등교사를 성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식당에서 혼자 저녁을 먹던 피해자에게 만취하도록 술을 먹인 뒤 식당으로부터 2㎞ 떨어진 초등학교 관사로 데려가 차례로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관련기사 : 섬마을 성폭행범들 “죽을죄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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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도 안심하고 못 다니고
지난해 9월21일 서울대학교 연구동에 있는 여자화장실에서 20대 여성 연구원을 성폭행하려던 60대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 조사 결과, 가해자는 여자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여성이 화장실에 들어오자 커터칼로 위협하며 성폭행을 시도했고, 피해자가 화장실 안에 부착된 비상벨을 눌러 경보음이 울리자 달아나다가 근처에 있던 다른 연구원들에게 붙잡혔다. ▶관련기사: 강남역 사건 모방했나…서울대 여자화장실서 60대 남성 성폭행 미수


#. 길거리 걷다가 돌을 맞고
서아무개(26)씨는 지난 1월14일 새벽 2시께 귀가하던 20대 여성 2명을 쫓아가 길이 18㎝ 돌로 여성들의 얼굴을 가격했다. 피해를 입은 여성 한 명은 치아가 손상·함몰됐고, 다른 한 명은 볼이 4㎝ 정도 찢어졌다. 곧바로 택시를 타고 현장을 도망쳤다가 열흘 만에 경찰에 붙잡힌 가해 남성은 “술에 취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 살아남은 우리가 바꾼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우리 사회는 본격적으로 여성 혐오를 말하기 시작했다. 강남역 10번 출구의 포스트잇 추모 물결은 침묵하고 있던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혐오와 위협, 폭력을 각자의 ‘언어’로 표출하는 도화선이 됐다.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만든다’는 반발 등 ‘성 대결’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평등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정치적 말하기’(▶관련기사: “여성에게 조심을 강요하는, 이 사회에 화가 난다”)와 젠더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법·제도적 변화를 고민하는 토론회(▶관련기사: “여성혐오 침묵 깼으니 끝까지 갔으면 좋겠다”) 등이 꾸준히 열렸다.

지난 13일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열린 ‘강남역 이후, 다시 만난 세계’ 집담회에서 페미니스트 그룹 ‘강남역10번출구’ 이지원 활동가는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이후 페미니즘 활동을 이어가다 직장을 퇴사하고 여성학과에 진학하거나 진로를 페미니즘 활동으로 바꾼 이들의 이야기가 넘쳐난다”며 “강남역 사건은 여성들의 삶을 바꿔놓는 계기로 작동했다”고 말했다.(▶관련기사:강남역 사건 이후 1년, 우리 사회는 얼마나 변했나)

20대 여성들이 2016년 5월23일 오후 서울 서초경찰서 앞에서 경찰이 ‘강남역 여성살인사건’을 정신질환 범죄 유형로 규정한 데 항의하는 행위극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여성혐오 범죄’ 수사를 신설할 것을 요구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20대 여성들이 2016년 5월23일 오후 서울 서초경찰서 앞에서 경찰이 ‘강남역 여성살인사건’을 정신질환 범죄 유형로 규정한 데 항의하는 행위극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여성혐오 범죄’ 수사를 신설할 것을 요구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 우리의 두려움은 용기가 되어 돌아왔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벌어진 지 1년,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한국여성민우회가 강남역 살인사건 1주기를 맞아 SNS에서 해시태그(#)‘강남역―1주기―변한 것과―변하지 않은 것’에 대한 글을 모았다. 누리꾼들은 변한 것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 “나” “여성의 삶”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은 사회” 등을 꼽았다. 변하지 않은 것으로는 “남성의 삶” “조심해서 들어가라는 친구의 인사말” “어차피 모든 곳이 강남역임” “여전히 넘쳐나는 여성 혐오와 그로 인한 범죄” 등이 나왔다.

강남역 살인사건 발생 직후 많은 여성들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해소하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국가에 요구했다. 하지만 국가는 공중화장실 법 개정과 정신장애인 관리감독 강화를 제시하며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13일 열린 집담회에서 장다혜 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정부 대책은 ‘가해자 처벌·피해자 보호’에 그쳤다. 여성혐오로 가득 찬 사회를 평등하게 바꾸는 것부터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시 붙인다’에 참석한 시민들이 포스트잇에 써 붙인 추모글. 페미니스트 모임 ‘믿는페미’ 계정 갈무리
다시 붙인다’에 참석한 시민들이 포스트잇에 써 붙인 추모글. 페미니스트 모임 ‘믿는페미’ 계정 갈무리

사건에 대한 제대로 된 진단과 처방이 나오지 못한 만큼 성평등 공약을 내세운 문재인 정부에 기대를 거는 이들이 많다. 문재인 대통령은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하며 여성 공약을 발표했다. 뼈대는 대통령 직속 ‘성평등위원회’ 설치와 ‘젠더폭력방지법’ 제정이다. 특히 여성에 대한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스토킹, 인신매매, 데이트 폭력 등 젠더 폭력에 대한 처벌 및 피해자 보호를 위한 법체계 마련 △가정폭력 범죄자는 현행범으로 체포할 수 있는 ‘체포우선제도’ 도입 △몰래카메라 촬영과 촬영물 유포자에 대한 처벌 강화 등을 약속한 바 있다. (▶관련기사 : 문재인 “페미니스트 대통령 되겠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었던 수많은 포스트잇에 적힌 ‘살아남은 자’들이 꿈꾸는 세상은 올 수 있을까.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 1년이 되는 17일,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다시 포스트잇이 붙을 예정이다. 범페미네트워크가 주최하는 추모제가 열린다. 추모제 제목은 “두려움은 용기가 되어 돌아왔다”이다.

김미영 석진희 기자 instyle@hani.co.kr, 그래픽 강민진 디자이너 rkdalswls3@hani.co.kr

지난 11일 저녁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열린 ‘강남역 여성혐오범죄 희생자 1주기 추모예배 - 살아남아
지난 11일 저녁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열린 ‘강남역 여성혐오범죄 희생자 1주기 추모예배 - 살아남아

<참고자료> 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경향신문 사회부 사건팀 기획·채록, 나무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