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활 침해’ ‘명예훼손’ 한마디에
기업들 ‘정통망법’ 악용…불리한 글들 삭제 요청 잇따라‘이랜드’ 게시물 사라져…시민단체 “검열행위” 법개정 요구 #1. 인터넷 포털 네이버에서 카페 ‘그림책 읽어주는 엄마’를 운영하는 누리꾼 ‘향기로운’은 지난 22일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의 게시글 하나가 삭제된 것을 발견했다. 이날 4건의 글이 삭제된 데 이어 30일에도 또다른 글이 삭제됐다. 모두 ㅎ출판사의 어린이용 책 값을 매장별로 비교한 뒤 최저 가격을 알려주는 글이었다. ㅎ출판사는 이를 명예훼손이라고 주장했고, 네이버는 이 주장을 받아들여 지체 없이 글을 삭제한 것이다. 네이버는 ‘명예훼손을 사유로 게시중단 요청이 접수됐고, 이로 인해 고객님의 게시글이 임시 게재중단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라는 설명을 카페에 남겨뒀을 뿐이다. #2. 네이버 블로거 김철(39)씨도 지난 14일 블로그 글을 삭제당했다. 이어 16일에는 삭제에 항의하는 글과 뉴스사이트에서 퍼온 글이 사라졌다. 인터넷 포털 다음에서도 같은 날 비슷한 상황이 일어났다. 다음 블로거 박정근(41)씨는 다른 곳에서 퍼오거나 자신이 작성한 글 4개를 14일과 16일 삭제당했다. 이처럼 지난 14일과 16일 다음과 네이버 등 포털에서 수십개의 게시물이 사라졌는데, 모두 이랜드 매장 불매운동 등 이랜드그룹 사태와 관련된 글이나 기사들이었다. 계열사인 이랜드월드 쪽이 명예훼손을 당했다는 주장을 제기하자, 해당 포털이 글을 삭제한 것이다. 이런 조처들은 지난달 27일 시행된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정통망법)에 근거하고 있다. 법을 보면, 한쪽 당사자가 인터넷 공간에 떠 있는 글이 ‘사생활 침해’나 ‘명예훼손’이라는 등의 주장을 하면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는 바로 임시조처(삭제)를 해야 한다. 이 법이 생긴 뒤 기업들이 자신들에 불리한 글에 대해 명예훼손 등을 이유로 삭제를 요청하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포털 다음의 경우 삭제됐던 일부 글들이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심의에서 명예훼손이 아닌 것으로 판정돼 1주일 뒤 복구됐고, 네이버도 누리꾼의 항의가 들어오자 일부 글을 복구했다. 무고한 글들이 마구 제재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김철씨는 “삭제를 당한 뒤 글을 퍼오거나 쓸 때 자기검열에 빠진다”며 “뉴스를 퍼온 경우 출처에 대해서는 문제 제기를 하지 않고 개인인 블로거에게만 제재를 하는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보통신윤리위원회는 “명예훼손 부분은 사법적인 최종 결정이 아니라 일종의 조정”이라며 “임시조처를 하는 것은 신고한 사람의 권리를 더 우선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시민단체들은 명백한 검열 행위라며 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함께하는 시민행동의 주미진 정보인권국 간사는 “이런 식이라면 소비자 권리를 찾기 위한 어떤 노력이나 문제 제기도 명예훼손으로 몰아붙일 수 있다”며 “명예는 물론 보호해야 하지만, 그것을 거대 자본이 교묘하게 악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보통신 감시·검열제도 폐지를 위한 시민사회단체 연석회의(준)’는 30일 기자회견을 열고 “표현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자 자본에 의한 검열이라 아니할 수 없다”며 △포털사이트의 임시조치 제도 폐지 △이용자에 대한 사과 △정통망법 관련 조항 폐지 등을 촉구했다. 이정훈 이정국 기자 ljh9242@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