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일주일 동안 수만명의 토플 수험생의 애를 태웠던 ‘토플 대란’이 16일 진정됐다. 이 시험을 출제하는 미국교육평가원(ETS)이 이날 급히 6월에 한국에서 특별시험을 실시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미국교육평가원의 ‘선처’에 따라 울고웃는 한국 영어시험 시장의 종속성을 그대로 보여줬다. 한마디로 유학 열기와 영어 광풍이 몰고온 ‘토플의 식민지’라고 할 만하다.
이번 특별시험 실시가 토플 대란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를 계기로 영어가 권력화한 한국사회의 현실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토플 대란의 주원인은 무엇보다 지난 7~8년 동안 비약적으로 늘어난 응시생 수다. 2000년에 5만여명에 머물던 응시생의 수는 2005년 그 두 배인 10만명을 넘어섰다. 8만여명인 일본보다도 훨씬 많은 수다.
우선 미국 유학을 노리는 학생들이 주된 응시자이다. 토플 대란에서 가장 큰 고통을 겪은 이들도 당장 유학 수속을 밟아야 하는 유학 준비생들이었다. 미국 이민통관집행국의 2006년 말 자료를 보면, 미국 체류 유학생 가운데 한국인은 9만3천여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다. 2위는 7만6천여명의 인도다. 박거용 상명대 교수(영어교육)는 “일본만 해도 국내 학위를 더 높이 평가해주기 때문에 유학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우리나라는 외국 학위를 더 쳐준다”며 “대학 교육의 질을 높여 외국에 나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학풍을 세우는 게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유학 미국 쏠림 심한데다 기업도 채용 잣대로
인터넷시험 바뀐 뒤 ETS ‘뒷짐’이 혼란 불지펴
초·중·고교 학생들의 응시 증가도 토플 수요을 크게 늘리는 요인이다. 외국어고 등 특목고들이 특별 전형에서 토플 성적을 요구하는 탓이다. 토플뿐 아니라 텝스, 토익 등도 평가 요소이지만, 학생들은 인지도와 국제적 쓰임새를 고려해 토플을 압도적으로 많이 선택한다. 정현(안양 비산중 1년)군은 “우리 반 40명 가운데 30명은 토플을 공부한다”며 “미리 점수를 따놓으면 나중에 외고 가는 데 좋다고 해 학원에서 토플시험 신청을 다 해준다”고 말했다. 특목고 전문 토피아학원의 조경호 홍보이사는 “중학교 때는 특목고에 가기 위해 필요하고, 고등학교 때는 대입 전형에서 유리하고, 대학에 가서는 교환 학생이나 유학을 가기 위해 토플 점수가 필요하다”며 “일찍부터 토플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전국 특목고의 한 해 모집정원이 1만2천여명이고, 서울지역 6개 외국어고 입학경쟁률 평균이 6 대 1인 점을 고려해 계산하면, 특목고 입시를 위한 토플 응시생만 한해 7만여명에 이르는 셈이다. 이와 관련해 외국어고들이 입학 전형에서 토플을 제외하는 방안을 검토할 예정이라는 일부 언론 보도도 나왔으나 서울 ㄷ외고 관계자는 이를 부인했다.
여기에 일반 회사들이 사원을 뽑으면서 영어 시험을 치는 대신 토플 점수 제출을 요구하면서 구직자들도 대거 토플시험에 몰려들고 있다.
토플 대란에는 바뀐 시험 방식도 한몫을 했다. 미국교육평가원은 지난해 9월부터 시험 방식을 변경해 전세계에서 응시생들이 동시에 인터넷을 통해 같은 문제를 풀도록 했다. 이에 따라 응시생들이 시험을 볼 수 있는 횟수가 크게 줄었다. 이전 시험방식에선 수험생들이 수시로 시험장을 찾아서 시험을 볼 수 있었지만, 새 방식에선 그게 불가능해졌다. 박정 어학원의 조성준 부원장은 “새 방식이 도입돼 시험을 치를 기회 자체가 크게 줄어들면서 혼란이 시작됐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미국으로 가려는 유학생들에게 ‘토플’을 대체할 뚜렷한 대안은 없다. 영국에서 주관하는 영어능력시험인 아이이엘티에스(IELTS)가 있지만, 이 시험은 약 4500여개로 추정되는 미국의 대학 가운데 900여 곳에서만 인정을 받고 있다.
토플 대란의 결정타는 시험을 시행하는 미국교육평가원이 날렸다. 평가원은 일주일 동안 혼란이 일어났는데도 홈페이지에 단 두 번 짤막한 공고를 내는 데 그쳤다. 미국 교육평가원의 국내 홍보대행업체 에델만 쪽은 16일 “교육평가원 사절단이 다음달 방한해 이번 상황을 해명하는 기자회견을 열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미국의 한 기관에 우리나라가 휘둘리는 현상을 두고 이승렬 영남대 교수(영문학)는 “토플이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위계질서 만들기”라고 말했다. 실제의 필요와 관계없이 영어가 하나의 권력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도정일 경희대 교수(영문학)는 “토플 성적과 영어실력이 무관하다는 것은 교수들도 알고 미국에서도 아는데, 토플에 목매는 건 국가적으로 망신스러운 것”이라며 “공신력 있는 시험을 개발하는 등 사회적 각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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