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안의 목소리
어쩜 저리도 태평할 수 있을까? 설거지를 하며 나는 한숨이 절로 나왔어요. 학교에서 돌아오니 아침 먹은 그릇이 그대로였던 거예요. 저녁이 가까워 오는데도 언니는 이불을 덮고 누워 팝송을 듣고 있었죠. 엄마는 파출부일로 파김치가 되어 저녁 늦게나 돌아오실 텐데.
물 항아리 뚜껑을 여니 바가지가 바닥에 떠 있네요. 언니한테 말했어요. 내가 물을 길어 올 테니 언니는 막내 좀 찾아보고 연탄불도 살펴보라고. 초등학교 6학년, 키도 작고 빼빼 마른 동생이 물지게를 지고 집에서 1㎞쯤 떨어진 우물로 물을 길러 간다는데, 아무려면 저렇게 누워만 있을까싶었어요. 그때는 언니 마음이 아플 때라 눈꼴이 시어도 내가 봐줘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무거운 지게로 열발짝도 떼지 못해 풀리곤 하는 다리를 쉬며 달래며 물을 가득 담아 끙끙 짊어지고 집에 오니 꾀죄죄한 몰골의 동생이 들어와 있었어요.
“작은누나! 엄만 언제 와? 나 배고픈데….”
“큰 누나가 밥 안했어?”
“큰누나는 지금 자고 있어!”
잔다는 말에 참고 있던 화가 솟구치면서 언니한테 악을 쓰듯 냅다 소리를 질러버렸지요.
“온 종일 잠만 자고 라디오 듣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맨날 이게 뭐야! 도대체 언니가 집에서 하는 일이 뭔데?”
내친 김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계속 주절거리는데, 머리꼭대기까지 덮여있던 이불이 뒤로 확 젖혀지면서 찢어질 듯 새된 목소리가 두 귀에 꽂혔어요.
“그래, 너 잘났어 이년아!”
언니는 언제부턴가 말버릇 하나가 생겼습니다. 학교를 다니는 저 또래와 자기 비위를 건드리는 모든 것들을 ‘잘난 것들’로 싸잡았어요. 내년이면 나도 중학교에 가는데, 할 수만 있다면 언니가 나 대신 학교를 다니고 내가 그만두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생각으로 코끝이 시큰해지면, 깜깜한 밤에 혼자 나가 무심히 밤하늘을 바라보곤 했어요.
우리 집은 아버지가 과일 도매를 하셔서 집에 늘 과일이 풍성했고 살림살이도 어렵지는 않았어요. 어느 날, 우리 식구는 좁고 불편한 단칸 셋방으로 이사를 가게 됐어요.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섰대요. 삼남매 중에 맏이인 언니는 학교에 못 간걸 억울해 하고 불만도 많았어요.
‘돈 다 털어먹고 죽자 죽어!’ 언니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 다음 날, 방 한구석에서 언니가 공책에 갈겨 쓴 낙서를 봤어요. 순간,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면서 귓속에서 찌르르 전류가 흘렀어요. 행여 엄마가 볼까봐 나는 그걸 조각조각 찢어버렸어요. 울고 있는 엄마가 그 낙서를 보면 쓰러질 게 분명했지요.
언니 때문에 지쳐 있는 엄마에게 남동생인 막내가 돈을 내놨어요. 궁터에서 화살을 줍는 일을 며칠 했다고 하면서요. 엄마도 기가 막혔지만 나도 동생이 그 일을 해서 돈 벌 생각을 하는 줄은 정말 몰랐어요. 엄마가 동생을 끌어안고 울던 기억이 나요.
그런 중에도 나는 나대로 중학교에 가고 고등학교에도 진학했지요. 언니가 집을 떠나 혼자 삶을 일구어낸 억척이로 다시 식구들과 만났을 때, 언니는 이미 식구들을 모두 끌어안고 세상을 굳게 살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공장과 식당일, 옷 장사 등 궂은일을 마다않고 돈을 모은 거죠.
오랫동안 헤어져 살았지만 언니의 깊은 속내에는 식구들에 대한 사랑의 끈이 단단히 매어 있었던 거예요. 어쩌면 긴 세월을 그 힘으로 견디지 않았을까싶어요. 그 힘은 마흔을 훌쩍 넘은 언니가 지금도 친정 엄마 아버지를 보듬고 ‘잘난’ 척하는 동생들을 그윽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또 다른 에너지였던 거예요. 황토









































![학교가 축구를 ‘금지’하는 이유 <font color="#00b8b1">[똑똑! 한국사회]</font>](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6/0505/53_17779317310082_20260505500066.web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