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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코로나 사태의 기이한 친숙함 / 조문영

등록 :2020-02-12 18:22수정 :2020-02-13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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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영 ㅣ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광둥성 선전에서 만나온 중국 친구와 오랜만에 위챗(소셜미디어)으로 대화를 나눴다. 명절을 맞아 장시성 농촌으로 돌아왔는데 코로나 사태로 걸음이 막혔다. 우한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경찰이 마을 입구마다 흰 띠를 두르고 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했단다. 주변 마을을 돌며 새해 인사를 나누는 농촌의 전통도 전염병 앞에선 힘을 잃었다. 작년 설을 쇠자마자 선전 폭스콘 공장에 일하러 갔으니 일년 만의 귀향이다. 부모님이 계신 인근 마을까지 걸어서 삼십분인데 시가에만 갇혀 있자니 흰 띠가 야속하기만 하다.

지인들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코로나로 수백명이 죽는 판에 세배가 대수냐며 혀를 찼다. 우한 방문 사실을 숨기고 연회장을 찾은 사람 때문에 4천여명이 자가격리를 하게 됐다는 기사가 돌면서 ‘무개념’ 중국인 논란이 한창인 때였다. 하지만 뭔가 찜찜하다. 별안간 취소되어 너무나 아쉬운 만남이 내게도 있을까? 감염자 수가 늘면서 대부분의 행사가 무산되었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중국 현지조사도 포기했다. 방학 때 만나자 약속했던 친구들과도 대부분 카톡으로 안부를 전한다. 아쉬움은 남지만 그렇다고 마음을 후빌 정도는 아니다.

감염 우려로 사람들의 활동이 줄어들고 경제가 위축된 것은 맞지만, 코로나 사태 전과 후의 일상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게 오히려 우리 사회의 병리를 드러내는 것 같다. “××번 확진환자”의 이동 경로를 샅샅이 추적하는 보도가 낯설지 않다. 인간이 바이러스가 아니라 사람 취급을 받던 시절에도 관음증을 부추기는 1인 미디어나 여론의 신상털기가 득세하지 않았던가. ‘격리’ ‘봉쇄’ ‘입국 금지’처럼 전염병 비상사태에 등장한 단어들도 크게 무섭지가 않다. 국회부터 학교까지, 생각을 달리하는 상대와 대화를 시도하기보다 ‘우리’와 ‘저들’을 금 긋고, ‘저들’에게 낙인을 찍어 ‘우리’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혐오정치가 일상의 공포를 부추기지 않았던가. 여성, 성소수자, 난민, 가난한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사람들은 물론, 이 혐오에 대한 자기방어로 제 몸에 가시를 두르고 고슴도치가 되어버린 사회적 약자들까지 분리와 배제의 정치에 연루되면서 공포라는 감염은 무방비로 확산되고 있다.

내가 당신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불안감에 온·오프라인에서 차단벽을 치느라 바쁜 한국 사회에 이번에는 신종 바이러스까지 창궐하고 있다. ‘우리’와 ‘저들’을 필사적으로 구분하는 혐오정치의 문법은 기존의 구분을 재생산하면서, 혹은 ‘저들’의 범주를 확대하면서 기승을 부리는 모양새다. 사드, 미세먼지, 홍콩 시위를 거치면서 확산 중이던 반중 감정이 우한발 전염병을 맞닥뜨리면서 ‘저들’의 자리에 중국인을 밀어넣는 게 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페미니스트 학자 사라 아메드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원래부터 두려운 존재여서가 아니다. “공포의 ‘기호들’(사인)이 도처에 유포되면서 (예컨대) 흑인 타자는 두려운 존재가 ‘되고’ 만다.” 혐중을 부추기는 기호들도 자의적으로 선택되고 유통된다. 바이러스 감염이라는 불가역적인 표식에 미개, 불결, 뻔뻔함 등 예전의 기호들이 덧씌워지고 마구잡이로 조립되면서 혐오는 증식한다. 감염 증상이 나타나도 혐오 바이러스가 더 두려워 신고를 주저할 판이다. 당황스러운 것은 혐오정치의 문법이 지구 도처에서 반복되다 보니 한국인과 중국인이 ‘동양인’으로 묶이고, 어느새 서구인의 ‘저들’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우리 ‘한국인’은 아니라고 하소연할 것인가, 아니면 분리와 배제를 답습하는 일상의 공포정치를 극복하기 위해 함께 머리를 맞댈 것인가.

언로를 봉쇄했다가 도시까지 통째로 봉쇄하고 만 중국 정부의 패착은 오랫동안 전세계의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비판의 자격을 갖추려면 뻥 뚫린 언로에서 오가는 말과 글에 다소간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중국인 유학생 ×천명 입국… 대학가 신종 코로나 비상”이라는 문구로 대학을 병동 취급한 기자는 일방적 격리가 기본권을 침해할 수 있다며 사태 대응을 위한 협의체를 요청하는 대학생들로부터 세계시민에 대한 예의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코로나 사태가 기존의 혐오정치를 확대재생산하는 비극으로 남을지, 지구 다양체의 공생을 도모하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지 갈림길에 놓인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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