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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칼럼] 그 시절 인사동이 마냥 그립다

등록 :2017-10-19 18:17수정 :2017-10-19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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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20년 전만 해도 인사동은 전통문화와 예술의 거리였다. 문화예술인들이 도심 속의 사랑방인 양 모여들면서 문예의 향기가 풍기는 격조 높은 거리로 되었다. 소설가 김주영은 외롭고 지치고 힘들 때 별다른 약속 없이 인사동에 와서 길 위아래를 두세 번 왔다 갔다 하노라면 촉촉한 고향의 향기가 있었다고 했다.

긴 연휴 기간 세상사 기삿거리가 마땅치 않았던지 텔레비전 뉴스에 모처럼 문화계 소식이 많았다. 그중 한 방송에서는 ‘터줏대감들 사라지는 인사동 골목’이라는 제목하에 전통문화가 숨쉬던 인사동만의 매력이 사라지고 있다는 밀착카메라의 보도가 있었다.

실제로 20년 전만 해도 인사동은 고서점, 화랑, 고미술상, 민예품점, 표구점, 필방, 한지, 공예품 가게들로 이루어진 전통문화와 예술의 거리였다. 그리고 문화예술인들이 도심 속의 사랑방인 양 모여들면서 문예의 향기가 풍기는 격조 높은 거리로 되었다. 소설가 김주영은 외롭고 지치고 힘들 때 별다른 약속 없이 인사동에 와서 길 위아래를 두세 번 왔다 갔다 하노라면 촉촉한 고향의 향기가 있었다고 했다. 고은 시인은 그런 인사동을 이렇게 노래했다.

“인사동에 가면 오랜 친구가 있더라/ 얼마 만인가/ 성만 불러도/ 이름만 불러도 반갑더라// 오로지 빈손을 잡고/ 그냥 좋기만 하더라// 인사동에 오면/ 그런 날들 가슴에 묻어/ 고향 같은 골목들/ 그냥 좋기만 하더라// 서로 나눌 지난날이 있더라// 밤 이슥히 손 흔들어/ 헤어질 친구가 있더라”

안국동 로터리에서 남쪽 광장까지 1킬로미터 남짓 되는 인사동길은 본래 작은 개천이었다. 이 길이 가볍게 휘어져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조선시대엔 개천 양쪽으로 충훈부, 도화서 등 여러 관아와 양반들의 저택이 퍼져 있었다. 정암 조광조, 율곡 이이, 개화기 박영효의 집이 이 동네에 있었다. 400년 된 회화나무, 민가다헌, 경인미술관의 한옥이 그 시절의 자취이다.

19세기말 개화바람이 불면서 인사동 일대는 교회, 인쇄소, 출판사, 요릿집, 병원 등이 들어서면서 신식 동네로 변해갔다. 천도교 수운회관, 숭동교회, 태화관 터, 해정병원 등이 그 옛날을 말해준다.

그러다 이 개천이 복개되면서 새로 생긴 인사동길 좌우로는 상가가 형성되었다. 먼저 종로, 충무로에 있던 고서점들이 들어섰다. 한때 간송 전형필이 인수했던 ‘한남서림’과 이겸노의 ‘통문관’이 그 상징이다. 그 시절엔 일석 이희승, 동빈 김상기 같은 학자들이 인사동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6·25동란 이후에는 주인 잃은 고서, 고가구, 고미술품들이 인사동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1960년대까지는 고서점, 고미술상, 필방, 표구점의 거리로 되었다. 통인가게, 상문당 표구, 구하산방 그리고 수도약국이 그 시절을 말해준다.

70년대로 들어서면 현대화랑을 필두로 상업화랑이 등장했다. 미술 붐이 일면서 동산방, 선화랑, 가나화랑, 노화랑, 가람화랑 등이 속속 문을 열었다. 운보 김기창의 화실, 일중 김충현과 여초 김응현의 서실도 여기에 있었다. 고옥당, 금당, 고정실 등 고미술상도 전성기를 누렸다. 이 시절 인사동길에선 도상봉, 장욱진, 소정 변관식 같은 노화가들이 거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인사동이 명실공히 문화예술인의 거리로 되면서 샛길 안쪽의 한옥에는 전통의 분위기가 있는 음식점들이 들어섰다. 문인들은 선천집, 예술인은 사천집, 최순우 관장 팀은 영희네집, 언론인은 경향식당이 단골이었다. 가난한 화가들이 잘 가는 사동곰탕, 부산식당도 이때 들어섰다. 펜클럽의 문인들, 어문학회의 학자들, 미술단체의 화가들은 월례, 연례 모임을 인사동 식당에서 갖곤 했다.

1980년 정일학원 자리에 민정당사가 들어왔지만 정치인은 밥만 먹고 떠났을 뿐 이 거리를 차지한 적은 없었다. 그 대신 골목 안쪽에 우정, 다미, 가회 등 많은 음식점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 80년대로 들어서면 오랜 불경기로 상업화랑은 위축되었지만 전시장을 대여해준 관훈미술관, 민중미술가들의 그림마당 민 등 대안공간이 생기면서 인사동은 젊은 미술인들의 차지로 되었다. 그때부터 매주 수요일은 전시회 오픈이 있는 축제의 요일로 되었다.

80년대 후반 민예총, 민미협이 인사동에 들어서고 <한겨레신문> 창간 사무실이 안국빌딩에 자리 잡으면서 민족예술인, 해직기자, 해직교수 등 시대가 낳은 보헤미안들이 인사동에서 한데 어울렸다. 리영희, 임재경, 성유보 등이 그 면면이다. 여기에다 명동에서 노닐던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 평론가 구중서, 시인 신경림 등 문인들이 대거 인사동으로 합류했다. 이들은 명동이 번화가로 변하자 관철동 뒷골목으로 옮겨갔다가 거기마저 젊은이들 차지로 되자 인사동으로 자리를 옮겨온 것이었다. 천상병 시인 부인이 차린 ‘귀천’, ‘수희재’ 같은 전통찻집이 그 시절에 태어났다.

이렇게 형성된 인사동의 문화예술 분위기는 강력한 흡입력을 갖고 젊은 시인 소설가 평론가 화가 연극인 사진작가 언론인들을 끌어들였다. ‘실비집’ ‘평화만들기’ ‘소설’ 같은 술집은 언제나 이들로 만원이었고 항시 예술 담론이 전개되었다. 누구의 말대로 인사동은 작가의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뇌관이었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술판의 끝자락은 언제나 소란했다. 술집 ‘소설’엔 손님과 주인이 따로 없었고 ‘평화만들기’엔 평화가 없었다. 그때가 사실상 인사동의 전성기였다.

그런 인사동이 아이러니하게도 1988년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되면서 급격히 변하기 시작하였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전통문화의 거리에 관이 개입하여 꽹과리 치고 떡판을 두드리는 축제를 벌이면서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인사동 거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7년 처음으로 일요일을 차 없는 거리로 시행하자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하루 10만명에 이를 정도였다. 인사동길의 주인이 그렇게 완벽하게 바뀌게 되자 기존의 고서점, 화랑, 민예품 가게를 밀어내고 값싼 기념품 가게와 호떡집, 실타래 엿, 쫀득이 아이스크림 집이 길가를 차지했다.

상권이 바뀌면서 1999년, 영빈가든 자리 약 450평에 고층상가가 세워질 참이었다. 이에 동서표구, 아원공방 등 열두 가게가 집달리의 퇴거통보를 받기에 이르렀다. 참다못한 인사동 사람들과 문화예술인들은 인사동 ‘작은 가게 살리기 운동’을 펼쳐 이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부지를 인수한 ㈜쌈지가 건축가 최문규에게 의뢰하여 열두 가게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마치 인사동길을 4층 건물 안에 재현한 듯한 공예품 전문 쇼핑몰로 만든 것이 지금의 쌈지길 건물이다.

2011년부터 인사동은 365일 차 없는 거리로 실시되면서 완전히 젊은이와 관광객의 거리로 되었다. 그리하여 지난날의 터줏대감들은 인사동이 망했다고 한탄을 발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차피 일어날 세대교체였다. 오히려 나는 이들이 신촌, 홍대 앞, 신사동 가로수길 같은 유흥의 거리가 아니라 그 옛날의 예향(藝香)과 문기(文氣)를 배우고자 인사동에 나오고 있는 것을 대견스럽게 생각하며 변함없이 인사동을 사랑하며 드나든다. 골목골목엔 아직도 내가 잘 가는 음식점, 찻집이 있고, 보고 싶은 전시회, 갖고 싶은 민예품, 간혹은 반가운 얼굴도 있다.

그러나 사라진 것은 역시 아쉽고 그립기만 한 법. 연휴 끝 여지없이 인사동에 나갔다가 ‘흐린 세상 건너기’에서 아무도 못 만나고 수정과 한잔 마신 뒤 샛길로 돌아나오자니 노시인 강민이 읊은 황혼의 인사동 노래가 가슴 저미게 다가온다.

“붐비는 인파 속에도/ 내가 찾는 이는 없다/ 오늘도 내 인사동 걷기는 여전히 허전하다/ 추억처럼 불빛이 켜지고 있다.// 어딘가 전화라도 걸까/ 눈시울이 시큰할 뿐/ 휴대전화를 만지는 손가락은 뻣뻣이 움직이지 않는다// 진공(眞空)의 거리/ 어디선가 그리운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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