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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

역사학자

“실내장식은 상당히 아름다웠다. 음식도 그럭저럭 괜찮았고 어떤 것은 꽤 좋았으나 귀를 찢는 듯한 악기 소리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19세기 말 궁중연회에 참석했던 한 외국인의 소감이다. 그의 시각과 후각, 미각은 조선의 전통에 잘 적응했으나 청각은 그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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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은 고종 즉위 40년이자 망육순(望六旬, 51살)이 되는 해였다. 고종은 이 양대 경절(慶節)을 열강의 특사가 참관하는 국제행사로 치러 대한제국이 근대 문명국가의 자격을 갖추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손님을 흡족하게 하지는 못할망정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주인의 도리다. 대한제국 정부는 프랑스에 양식기와 식탁 등을 주문하는 한편, 프로이센 군악대장 프란츠 에케르트를 3년 계약으로 초청했다. 1901년 2월, 50인조용 악기를 가지고 입국한 에케르트는 미리 조직된 군악대를 6개월 동안 가르쳐 궁중에서 첫 연주회를 열었다. 이듬해 6월, 정부는 탑골공원 서쪽 구석에 군악대 건물을 지었고, 군악대는 이곳에서 연습하면서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에 공원 내 팔각정에서 시민을 위한 무료 음악회를 열었다. 서울 시민들은 이곳에서 서양 음악에 대한 감수성을 키웠다.

이에 앞서 1890년대 중반부터는 서양인 선교사가 세운 교회와 학교들에 풍금(리드 오르간)이 놓이기 시작했다. 풍금은 단 한 사람으로 하여금 40인조 오케스트라가 할 몫을 얼추 감당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학생과 신도들은 풍금 소리에 맞춰 찬송가를 부르며 서양 음악의 선율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1909년에는 관립고등학교에도 풍금이 비치되었다. 이후 풍금은 초등학교 교실의 필수 교구(敎具)로 자리잡았고, 풍금 소리는 대다수 아이들이 가장 먼저 듣는 악기 소리가 되었다. 더불어 서양 음악이 표준이 되고 전통 음악은 주변부로 밀려났다. 아무리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고 외친들, 이제 한국인들의 귀는 서양 음악에 더 익숙해졌다. 풍금은 ‘서양이 보편이고 동양은 특수’라는 생각을 심어놓는 데 큰 역할을 한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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