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면의 문제점을 평가하는 대신, 기사 이면에서 진행되는 과정을 문제화하는 방향으로, 이 글을 진행하려 한다.
정치와 동물의 관계는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솝우화>에서부터 <동물농장>에 이르기까지, ‘동물주의’란 본래 권력자를 풍자하기 위한 대중의 정치적 발명품이다. 반면 “민중은 개돼지”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들리는 오늘날 우리의 정치 현실이 있다. 여기서 나향욱 당시 교육부 정책기획관은 영화 <내부자들>의 대사에 나오는 ‘대중’을 ‘민중’으로 바꾸어 인용하는 기묘한 착오까지 일으켰는데,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민중’은 유신독재체제 이래 ‘한국의 진보 진영이 발견’해낸 고유한 개념이다. 그렇다면 나향욱의 의도하지 않은 언어 치환은 정치인이 민중에 대해 지니는, 무시와 두려움이 섞인 모순감정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권력에 대한 동물주의 비판은 때때로 정치인의 범주를 넘어선다. 사실 <내부자들>에서 “어차피 대중들은 개돼지입니다. 뭐 하러 개돼지한테 신경을 쓰고 그러십니까”라고 말한 사람은 언론사 주필 이강희다. 이강희는 겉으로는 지성과 품위를 갖추었지만 실제론 대통령을 만들어 내는 실세, 권력 위의 권력자로 등장한다. 대중영화가 당대 사람들의 사회인식을 소박하게 드러내는 텍스트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적어도 <내부자들>에 담긴 대중의 마음에서는 정치인과 언론인이 (정도와 방향의 차이는 있겠지만) 하나의 권력 연합체를 구성하는 사이 좋은 ‘내부자들’로 간주되는가 보다.
■ 언론은 권력의 감시자인가 내부자인가
과연 현실에서 정치가와 언론인의 관계는 어떠할까?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의 한국방송(KBS) 보도개입 사건에서, 공식적인 판정과는 무관하게, 우리는 언론 통제의 배후에 청와대가 있다고 느끼고 믿으며 분노한다. 동시에 정치와 언론 사이에 유지되어온 듯한 유대관계도 모호하게나마 감지한다. 김시곤 당시 한국방송 보도국장이 공개한 통화 녹취록에 따르면 그와 이정현은 누구보다도 큰 도움을 주고받는 각별한 선후배 사이였다. 김시곤은 “무슨 말씀인지 알고요. 아니 이 선배 솔직히 우리만큼 많이 도와준 데가 어디 있습니까? 솔직히”라고 말한다(한겨레, 7월1일치). 경향신문의 나향욱 고발기사에서도 이 문제의 발언이 이루어진 장소는 경향신문 기자들과 나향욱의 저녁 회식 자리였다고 한다. 이 상황들에는 여러 까다로운 문제들이 관련되어 있다. 우선 잘못된 정치-언론 관계를 고발한 언론인의 용기와 판단을 응원하고 지지한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은연중에 나타난, 정치권과 언론계의 오랜 친밀관계 그리고 개인, 조직, 구조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친목과 협조 관행에 대해선 우려가 앞선다.
미국 언론학자 마이클 셔드슨은 저서 <뉴스의 사회학>에서 정치인과 언론인 간에 맺어진 친밀한 대인관계가 구조적인 상호의존성으로 발전하는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그 미묘하되 강력한 연계성은 케네디가의 파티에 초대된 한 기자의 고백처럼, 그 융성한 파티 분위기에 젖다 보니 어느덧 ‘나 역시 그들 중의 하나’가 되고 싶어지는 기자의 열망으로 대변된다. 이처럼 정치인과 언론인 사이의 일상적 친밀감이 정치와 언론 간의 구조적 동질성으로 강화되는 반면, 정치로부터 언론의 독립이라는 저널리즘 제일의 원칙은 파괴되고 그 원칙을 실행하려는 기자의 노력은 더욱 예외적인 것이 되고 만다. 이 상황에서 청탁과 강제, 타협과 위협은 실상 그다지 뚜렷한 구분 없이 결합되어 자연스럽게 실행되기 일쑤다.
물론 특종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기자는 유력한 뉴스 정보원과 평소에 ‘은밀하고 위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언론계의 항변도 존재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관행은 한국 사회에서 특히 지독하게 고질화되었는데, 이는 박승관 교수의 지적대로, ‘공식적 커뮤니케이션 부문’이 비민주적이고 폐쇄적인 사적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식민화’된 한국 사회의 비극적 현실에 기인한다.
더욱이 정치권의 소통 개념에 치명적인 죄과가 있다. 정치인들은 국민의 존위가 걸린 문제일수록 비밀에 부치는 것이 당연하고, 들키면 운이 없는 것이라 치부한다. 예컨대 박근혜 대통령은 “사드 배치 과정이 워낙 위중한 국가 안위와 국민 안전이 달린 문제라서 공개적으로 논의를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한겨레, 7월15일치)고 말했는데, 양식을 가진 우리로서는 “위중한 사안일수록 더 사회적으로 소통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정현 보도개입 사건과 관련한, “(청와대 홍보수석이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안 들키게 했어야 했다. 들켰으면 책임져야 한다”는 유성엽 국민의당 의원의 기이한 주장 앞에서, 정파와 무관하게 편재하는 정치인들의 뻔뻔함에 거듭 실망하게 된다(인터넷한겨레, 7월5일치). 이렇듯 많은 겹으로 왜곡된 소통 조건에서 정치권의 보도 청탁 또는 개입은 수시로 일어나고, 언론계에서는 자신의 안전이나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해 자기검열을 하면서 위로부터 아래로 기자들을 협박하는 행태가 반복된다. 이처럼 기형적인 사회구조에서 기형적인 소통문화가 배양되며 기형적인 언론 행위가 양산된다. 또는 그 역도 물론 가능하다.
■ 비밀, 공공연한 비밀 그리고 공공의 진실한국 언론인의 딜레마는 정보 전달 기능에 충실하기 위해 부당한 권력구조와 어떻게 관계를 맺거나 끊어야 할까란 점이다. 김시곤과 이정현이 평소에 그토록 친하지 않았다면, 기자들이 공무원과 회식을 같이 하지 않았다면 그나마 진실마저 밝히지 못했을까? 그러나 어쩌다 있는 우연적인 행운의 결과를 기대하기 위해, 항상 지켜져야 마땅한 과정적 정당성은 매번 희생되어도 좋은 걸까?
원론적인 차원에서 ‘유력’ 취재원과 ‘고급’ 정보에 대한 얄팍한 강박부터 극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신 정치인이 ‘비밀’로 만들려는 진실, 민중들이 ‘공공연한 비밀’로 알고 있는 진실을 ‘공공의 진실’로 적극화하는 것이 언론의 책무다. 또한 권력의 내면뿐 아니라 그에 억압당하거나 대항적인 소수들의 목소리가 사회적으로 들려지도록 발굴하고 확산시키는 일이 언론인의 역할이다.
이런 점에서, 한상균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의 인터뷰 및 옥중편지 기사처럼 <한겨레>가 최근 활발히 접근하고 있는 인터뷰 기사 방식은, 유력한 정보원과 기자 사이의 일상적인 친밀관계에서 배양된 ‘뻔한’ 보도 형태가 아니어서 자못 흥미롭고 기대가 크다.

또한 기만적인 정치-언론 질서에 함몰되지 않고 그에 대해 반동을 도모하는 최근 언론계의 역동은 고무적이다. 현재 한국방송 사태는 정부의 보도개입이라는 매우 암울한 상황에서 싹텄지만, 공영방송의 책무를 회복하려는 기자들의 투쟁의 방향으로 전회하는, 유의미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체제 안에 이미, 항상 탈주의 가능성이 있다는 철학자 질 들뢰즈의 언술에 기대어, 언론의 근본가치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오늘날 언론의 자유와 독립의 실행 가능성을 기자들의 살아 있는 운동 속에서 희망해본다.
김예란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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