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쓴 아리스토텔레스. 위키미디어 코먼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쓴 아리스토텔레스. 위키미디어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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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섭 | 언론인 

 ‘하이데거 극장-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1, 2),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생각의 요새’, ‘광기와 천재-루소부터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시기·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한다.

플라톤은 ‘국가’(Politeia) 제4권에서 ‘자기 자신을 이긴다’라는 말에 대해 궁리한다. 자기가 자기를 이긴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진다는 것과 같다. 자기가 자기를 이기면서 동시에 자기에게 진다니 “이런 표현은 우습지 않은가?” 그런데 더 생각해보면 이 말은 우습지 않다. 왜 그런가? 자기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은 여러 힘이 각축하는 장이어서 ‘한결 나은 부분’이 ‘한결 못한 부분’을 제압할 때 ‘자기 자신을 이긴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상황이 반대일 때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진다’고 말한다. 플라톤은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을 ‘절제’라고 부르고, 자기 자신에게 지는 것을 ‘무절제’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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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은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의 상을 그려 보이는 중에 이런 이야기를 한다. 플라톤의 ‘아름다운 나라’는 세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가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 집단이다. 둘째가 용기를 발휘해 나라를 지키는 수호자 집단이다. 마지막이 욕망의 충족을 삶의 목표로 여기는 생산자 집단이다. 이 세 집단이 각자 제자리에서 자기 할 일을 충실히 함으로써 협화음을 내는 것을 플라톤은 ‘절제’라고 부른다. 절제가 실현되려면 ‘자기가 자기를 이기듯’ 나라의 더 나은 부분이 더 못한 부분을 이겨내야 한다. 이 절제가 사회적 질서로 구현돼 세 집단이 조화를 이룬 상태가 ‘정의’다. ‘아름다운 나라’는 지혜와 용기와 욕망이 절제 속에 어우러지는 정의로운 나라다.

플라톤은 이 나라의 상을 인간의 영혼에 다시 적용한다. ‘영혼’은 ‘작은 나라’와도 같다. 나라가 세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영혼도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혼에는 지혜를 관장하는 ‘이성’의 영역이 있고, 용기를 담당하는 ‘의지’의 영역이 있다. 또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의 영역이 있다. 인간이 훌륭한 법률 아래서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라면 세 힘이 조화를 이루는 건강한 영혼이 된다. 그러나 영혼이 바르게 자라지 못해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 영혼 내부에서 불화가 끊이지 않고 끝내 반란이 일어나 내전에 빠진다. 영혼의 병듦이란 이 반란과 내전을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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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영혼 삼분설’은 20세기에 들어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 삼분설’로 재탄생했다. 초기에 인간 정신을 ‘의식-전의식-무의식’으로 나누었던 프로이트는 후기에 인간 정신을 ‘이드-자아-초자아’로 재분류했다. 이드는 플라톤의 욕망처럼 ‘쾌락원칙’을 따르는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힘이다. 자아의 밑바닥에 잠복해 있는 비인격적 힘이기에 이드(Id, 그것)라고 불린다. 이드는 “부글부글 끓는 흥분으로 가득 찬 주전자”와 같다.

반면에 ‘초자아’는 자아 위에 군림하며 자아에게 명령하는 힘이다. 이드가 ‘쾌락원칙’을 따르는 것과 반대로 초자아는 ‘도덕원칙’을 따른다. 초자아는 아버지 혹은 아버지를 닮은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자아에게 ‘도덕적’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도덕적 명령’이 반드시 도덕적으로 올바른 명령은 아니다. 부성의 권위로 무언가를 행하라고 압박하고, 그 압박을 실행으로 옮기면 쾌감을 주지만 압박을 따르지 않으면 죄책을 안기는 것이 초자아다. 그 아버지는 훌륭한 아버지일 수도 있고, 자식을 구렁텅이로 빠트리는 파괴적인 아버지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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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자아와 이드, 이 둘 사이에 있는 것이 ‘자아’다. 이드가 쾌락원칙을 따르고 초자아가 도덕원칙을 따르는 것과 달리 자아는 ‘현실원칙’을 따른다. 자아는 이드와 초자아의 무분별한 요구를 다스려 중심을 잡음으로써 외부 현실의 격랑을 헤쳐 나가는 일을 한다. 자아는 외부 현실을 관찰하고 판단할 뿐 아니라 자아 자신을 관찰하고 비판하는 일도 한다. 이 자기관찰과 자기비판을 통해 자아는 정신의 온전함을 지켜나갈 수 있다. 그러나 자아가 이드의 침탈과 초자아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면 정신의 균형이 무너지고 자아는 내전과 유사한 상황에 빠진다. 내전에서 패배한 자아가 병든 자아다.

인간은 초자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광기로 내달리고 이드의 침탈에 점령당하면 야수로 질주한다. 패배한 정신은 광란하는 야수성의 정글로 바뀐다. 정신분석 치료는 자아의 힘을 키워 무의식이 날뛰는 정글을 다시 자아의 공간으로 바꾸는 작업이다. 자아는 이성과 의지의 도움을 받아 이드의 충동을 제압하고 초자아의 협박을 물리친다. 내부의 적대적 힘들을 제어함으로써 자아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다. 자아가 자기관찰과 자기비판을 통해 자율성과 주체성을 되찾을 때, 다시 말해 건강한 자아를 회복할 때 인간은 외부 현실의 파도를 이겨내는 유능한 삶의 항해자가 된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건강한 자아의 모습을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텍스트에서도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 세계에서 탁월함(arete, 아레테)을 발휘하는 인간의 지적 능력을 ‘실천적 지혜’(phronesis, 프로네시스)라고 부른다. 실천적 지혜를 갖춤으로써 인간은 정의롭고 인간답고 품격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그 실천적 지혜를 자세히 살피는 저작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다.

실천적 지혜는 ‘탁월한 품성’과 결부돼 있다. 탁월한 품성이란 용기, 절제, 온화함, 진실함, 부끄러워할 줄 앎 같은 덕성을 뜻한다. 이 덕성은 중간 상태, 곧 중용의 미덕이다. 용기는 만용과 비겁의 중용이고, 절제는 낭비와 인색의 중용이다. 부끄러워할 줄 앎은 파렴치와 소심함의 중용이다. 품성의 탁월성은 실천적 지혜를 요구하고, 실천적 지혜는 품성의 탁월성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진실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중용의 미덕, 곧 품성의 탁월성을 갖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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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실천적 지혜를 갖춘 사람은 지성의 능력이 뛰어나기에 곧잘 ‘영리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 집 안에서나 집 밖에서나 지혜롭게 처신하는 사람이 영리한 사람이다. 영리한 사람은 목표에 이르는 길을 잘 찾는다. 그러나 무슨 목표든 달성하기만 하면 영리한 사람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가지 조건을 덧붙인다. ‘목표의 고귀함’이 그것이다. “목표가 고귀하지 않은 영리함은 교활함일 뿐이다.” 영리함이 교활함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훌륭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대목에서 ‘영혼의 눈’을 이야기한다. “품성의 탁월성이 없다면 영혼의 눈은 고귀해질 수 없다.” 여기서 ‘영혼의 눈’은 사태를 꿰뚫어 보는 지성의 통찰력을 뜻한다. 지성의 통찰력이 품성의 탁월성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훌륭한 삶의 목표와 함께하지 않는다면, 통찰력은 참다운 지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언한다. “훌륭한 것은 훌륭한 사람에게만 보인다. 훌륭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실천적 지혜를 지닌 사람이 될 수 없다.” 훌륭한 목표, 아름다운 목표가 없는 ‘영혼의 눈’은 품성의 탁월성이 빠진 눈이고 교활함으로 물든 눈이다.

플라톤의 ‘영혼’이 ‘국가’로 이어져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정치학’으로 이어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윤리학에서 그려내는 ‘실천적 지혜를 지닌, 품성이 탁월한 사람’은 특히 공동체와 더불어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윤리적 탁월성이 없다면 정치적 탁월성을 기대할 수 없다. 정치는 윤리와 떨어져 있지 않다.

세간에 떠도는 말로 ‘장님 무사’와 ‘앉은뱅이 주술사’가 지난 몇 년 동안 국정을 농락하고 나라를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장님 무사’가 내키는 대로 칼을 휘두를 수 있었던 건 ‘앉은뱅이 주술사’의 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눈이 문제였다. 목표의 고귀함이 없는 영리함이 교활함이 되고 말듯이, 고귀한 것을 볼 줄 모르는 눈은 탐욕의 눈이 되고 만다.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이드의 무분별한 충동은 법도 윤리도 논리도 모른다. 이드의 눈은 욕망 충족이라는 저급한 목표밖에 볼 줄 모른다. 12·3 내란은 이드가 초자아의 탈을 쓰고 나와 무법적인 명령을 내린 것과도 같았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탐욕이 나라의 절도를 무너뜨렸고, 파렴치의 명령을 받은 폭도가 사람 사는 세상을 광기 어린 야수의 정글로 바꾸어놓았다. 정당의 간판을 단 내란 동조 세력이 야수들을 부추겨 혼란을 키움으로써 살길을 찾으려 몸부림쳤다. 이드의 탐욕을 뒤쫓는 보수,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는 보수는 보수가 아니다. 지혜와 절제가 다스리는 나라로 가려면 보수의 탈을 쓴 반헌법 세력부터 퇴출해야 한다.

kallipolis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