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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문화일반

바우하우스 100년, 새로운 삶의 방식 제안한 정신혁명

등록 :2019-03-16 09:12수정 :2019-03-18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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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슈
바우하우스 100주년의 의미

100년전 바이마르에서 만들어진
건축·디자인학교 ‘바우하우스’
‘아름답고 멋진 디자인’ 아닌
삶의 문제 해결하는 예술이 목적

평지붕, 노출 콘크리트, 철·유리 재료
기하학적 구조 건물, 타이포그래피…
바우하우스 유산 도처에 퍼져 있어
애플 아이폰 디자인도 영향 받아

1925년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데싸우 바우하우스 건물. 벽면의 ‘BAUHAUS’ 타이포그래피는 헤르베이트 바이어가 디자인한 유니버설 서체다. 건물의 정면과 후면이 따로 없는 입체적 구조다. 폐교 후 나치가 당사로 접수했다가 옛 동독 시절 주민센터로 재활용됐고 이후 원형이 복원됐다. 위키피디아
1925년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데싸우 바우하우스 건물. 벽면의 ‘BAUHAUS’ 타이포그래피는 헤르베이트 바이어가 디자인한 유니버설 서체다. 건물의 정면과 후면이 따로 없는 입체적 구조다. 폐교 후 나치가 당사로 접수했다가 옛 동독 시절 주민센터로 재활용됐고 이후 원형이 복원됐다. 위키피디아

▶ 바우하우스는 1919년부터 1933년까지 독일에서 운영된 건축·미술 전문학교다. 바우하우스 양식은 현대의 예술과 건축, 그래픽 디자인, 산업디자인, 타이포그래피 등에 광범위한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바우하우스 설립 100주년을 맞아, 김민수 서울대 교수가 바우하우스 운동의 의미와 현대 건축과 디자인에 미친 영향에 대해 분석했다.

화사한 봄은 오고 있는가? 일제 잔재에서부터 각종 농단과 부조리가 청산되지 않은 일상에 양극화로 엇갈리는 경제 불황과 재앙 수준의 미세먼지까지 삶을 위협하고 있다. 그래도 봄은 올 것이다. 현실의 절박감과 분노는 희망의 또 다른 얼굴이자 대안이 솟아나는 토양이다. 일상 삶과 의식을 개혁해 사람이 살 수 있는 사회를 구축하는 것. 바로 이것이 백년 전 독일 사회에서 새로운 근대 건축과 디자인 운동이 탄생한 궁극의 이유였다. 한국에서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올해는 바우하우스(1919~1933) 탄생 백 주년이 되는 해다. 외신에 따르면, 이를 기리기 위해 베를린에서 전시회, 공연, 강연 등 많은 행사가 열리고, 특히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뮤지엄에서 기념식과 전시가 준비되고 있다고 한다.

바우하우스는 지난 백년간 세계 건축과 디자인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주된 흐름이자, 지배적 원리나 법칙처럼 세상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예컨대 평지붕과 장식이 배제된 노출 콘크리트, 철·유리 등의 재료와 기하학적 구조로 지은 건물에서부터 대량 생산된 의자와 조명은 물론 스마트폰 등의 산업제품, 리듬감 넘치는 기하학적 형태의 그래픽, 타이포그래피, 심지어 산뜻한 누리집 디자인 등에 이르기까지 그 유산은 일상 도처에 퍼져 있다.

14년 존속했지만, 영향력은 엄청나

문헌 자료에 따르면, ‘국립 바우하우스’의 기원점은 설립자 발터 그로피우스가 벨기에 디자이너 앙리 반 데 벨데가 설립한 ‘바이마르 미술공예학교’의 운영을 위촉받은 19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반 데 벨데는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독일 사회에 퍼진 외국인 혐오주의 정서 때문에 할 수 없이 사임하면서 그로피우스를 추천했다. 이에 그로피우스는 1916년 산업과 예술을 결합한 새로운 교육기관 설립을 정부에 제안했지만 설득에 실패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독일의 1차대전 패전 이듬해인 1919년 3월에 미술공예학교를 또 다른 바이마르 소재 예술학교인 순수미술아카데미와 통합해 정부로부터 마침내 ‘바이마르 국립 바우하우스’ 설립 승인을 받아냈다. 1919년 4월12일은 기존의 두 교육기관이 통합해 단일 명칭으로 변경된 날이자, 그로피우스가 새 학교의 학장으로 취임한 날이다.

데싸우 바우하우스 개관일에 옥상에서 촬영한 초대학장 발터 그로피우스(왼쪽에서 일곱번째)와 교수진들. 바우하우스 아카이브
데싸우 바우하우스 개관일에 옥상에서 촬영한 초대학장 발터 그로피우스(왼쪽에서 일곱번째)와 교수진들. 바우하우스 아카이브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다. 바우하우스가 오늘날 한국의 많은 미술대학 디자인 관련 학과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처럼 단순히 ‘아름답고 멋진 디자인’을 생산할 직능인 배출에 목표를 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목적은 패전 후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에서 발생한 좌우충돌의 정치적 혼란과 극심한 경제공황의 현실에서 사회와 개인의 삶을 구해낼 ‘급진적 사회개혁 프로그램’에 있었다. 바우하우스가 추구한 조형 활동은 이러한 목적을 구현하기 위한 시각화 과정으로 디자인 행위의 바탕에 사회철학을 전제하고 있었던 사실을 눈여겨 봐야 한다.

그로피우스가 쓴 바우하우스 설립 선언문에는 이러한 배경이 잘 담겼다. 첫 문장은 “모든 시각예술의 궁극적 목표는 완전한 건축이다!”로 시작했다. 학교의 명칭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바우하우스란 직역하면 ‘짓다(bau)+건물(haus)’로, 철학적으로는 ‘사회의 구축’을 뜻한다. 바로 이를 시각화하기 위해 선언문에는 판화가 화이닝거가 제작한 고딕성당의 이미지가 담겼다. 성당 첨탑에서 빛이 방사하는 이 목판화 이미지는 바로 과거 건축가, 석공, 장인들이 합심해 이룩한 건조물로서 고딕 성당을 중심으로 모든 시각예술을 통합해 사회를 재구축하고자한 바우하우스의 열망과 이념의 표현이었다.

그로피우스는 참전해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고, 패전 후 나락으로 치닫는 정치경제의 현실 속에서 새로운 예술만이 독일 사회를 통합하고 구원할 것이라 여겼다. 여기서 그가 말한 ‘새로운 예술’이란 과거처럼 장인과 예술가 사이를 오만하게 구분하는 그런 유형의 예술이 아니었다. 이는 공방에서 협동을 통해 건축, 조각, 회화, 공예, 수공예 등 기존의 모든 시각예술을 통합하고, 과거의 비생산적인 예술에서 벗어나 미래를 새롭게 구축하는 ‘총체적 예술’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바우하우스의 공방과 실험실에서는 각종 디자인에서부터 무대공연에 이르기까지 이 원리에 입각해 가르치고 학습했다. 예술 자체는 방법을 초월하기에 가르칠 수 없지만 그 원리는 존재하기에 체계적으로 가르칠 수 있다고 보는 오늘날 건축과 디자인 교육의 원형이 바로 여기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로써 바우하우스의 학생들은 디자인 실기와 함께 예술사, 재료역학, 해부학, 물리 및 화학적 색채론 등의 학문적 이론교육은 물론 회계, 계약체결, 조직 인사 등 기업관리 이론까지 학습했다.

바우하우스는 1925년에 공업도시 데싸우로 이전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반지하를 둔 지면에서 사뿐히 들어 올려진 구조와 벽면을 유리로 마감한 이 건물은 하늘에서 보면 마치 지상에서 돌아가는 거대한 프로펠러를 연상시킨다. 건물의 정면과 후면을 따로 두지 않아 계급적 구분이 없는 민주적 디자인의 정신이 구현되었다. 이 건물의 각 공방에선 19세기 봉건적 구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위한 가구, 조명, 타이포그래피 등의 각종 디자인이 대량생산과 과학적 합리성 차원에서 실험되었다. 바우하우스가 보여준 과학적 체계와 기술혁신을 통한 디자인의 실천은 동시대 과학에 기반을 둔 철학 유파와의 학술적 연대와 교류를 통해 더욱 단단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라슬로 모호이-너지가 바우하우스 출판물을 위해 디자인한 타이포그래피와 편집 디자인. 바우하우스 아카이브.
라슬로 모호이-너지가 바우하우스 출판물을 위해 디자인한 타이포그래피와 편집 디자인. 바우하우스 아카이브.
데싸우 이전 후 1920년대 말에 일명 ‘비엔나 서클’ 혹은 ‘논리실증주의 철학’으로 알려진 철학가들과의 활발한 교류가 진행되었다. 비엔나 서클은 관찰을 통해 검증된 것을 신뢰할만한 지식으로 삼는 이른바 논리분석방법을 통해 과학 이론을 통합함으로써 새로운 철학을 추구했다. 한편 바우하우스는 기술과 과학적 보편성에 기초해 일체의 장식을 제거한 순수 기하학적 형태들을 사용해 형태와 색의 관계를 통합하고, 과거의 인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예컨대 교수진으로 참여한 칸딘스키가 1923년 바우하우스 내부에 제시한 삼각형, 사각형, 원의 세 가지 형태와 원색들의 상관성에 대한 기본 등식이나, 요하네스 잇텐이 기초과정에서 학생들에게 과거의 그 어떤 미학적 태도로부터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요구한 지도방법 등은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진행되었다.

보편적 사회 건설을 이념으로 한 바우하우스는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노동당(나치)과 물과 기름처럼 상충되어 1933년 베를린에서 폐교 조치되었다. 그리고 그로피우스를 비롯한 주요 구성원들은 미국을 망명지로 선택해 독일을 떠났다. 그로피우스는 1937년 하버드대 건축과 교수직을 수락하면서 캠브리지에 정착해 이듬해 자신의 집을 짓고 살았고, 베를린에서 바우하우스의 마지막 학장이었던 미스 반데 로우에 역시 1938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시카고와 뉴욕의 도시 경관을 바꿔 놓았다. 바우하우스 기초과정의 책임자이자 이론서 14권의 편집자로서 북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를 맡았던 라슬로 모호이-너지는 시카고에서 ‘뉴바우하우스’ 운동을 펼쳤다. 요셉 알버스는 블랙마운트 대학에서 기초과정을 가르치고 예일대학 디자인과를 맡아 미국 자본주의 토양에 바우하우스의 모더니즘의 씨를 뿌렸다.

그로피우스 하우스. 1938년 그로피우스가 하버드대 건축과 교수직을 맡아 미국에 정착한 이듬해 지은 집이다. 김민수 교수 제공
그로피우스 하우스. 1938년 그로피우스가 하버드대 건축과 교수직을 맡아 미국에 정착한 이듬해 지은 집이다. 김민수 교수 제공
주거문제 해결 위한 ‘조립식 주택안’도

바우하우스의 역사를 냉정히 살펴볼 때, 14년간 진행과정 전체가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디자인사가 안나 롤랜드의 말대로 ‘바우하우스의 유산’에는 애매함과 모순도 있었다. 애초에 산업제품의 원형을 디자인하려는 의도는 모호이-너지가 이끈 금속공방의 조명디자인을 비롯해 벽지 디자인 공방 등에서 산업적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전후 자재의 고갈과 치솟는 인플레이션의 경제악화로 이념과 실제 사이에는 간격이 있었다. 따라서 공방에서 디자인된 제품들의 원형은 실제 표준화된 기계생산의 과정을 거친 것이 아니라 다만 상징적 형태에 불과했으며 실제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는 제품들이었다. 1923년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전시회에 첫 선을 보인 ‘조립식 주택안’ 또한 건조과정의 표준화와 산업화를 통해 저가의 양질 주택을 공급해 심각한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이었다. 그러나 당대 기술로는 실현할 수 없는 고비용의 해결책이었다. 또한 그로피우스 이후 두번째 학장이었던 건축가 한네스 마이어는 건축과 디자인에서 “오직 기능만이 경제를 좌우한다”는 극단적 기능주의를 강조함으로써 바우하우스에서 심미적 요소를 걷어냈다.

그로피우스 하우스의 거실과 다이닝룸. 조명과 주방가구 등 인테리어 용품들은 독일에서 배로 싣고 온 것들로, 대부분 바우하우스의 생산품들이다. 김민수 교수 제공
그로피우스 하우스의 거실과 다이닝룸. 조명과 주방가구 등 인테리어 용품들은 독일에서 배로 싣고 온 것들로, 대부분 바우하우스의 생산품들이다. 김민수 교수 제공
그러나 이러한 모순과 애매함은 훗날 1950~60년대 바우하우스를 보다 과학적 단계로 끌어 올린 울름조형대학과 디이터 람스가 이끈 독일 브라운사에 의해 마침내 생명력을 획득했다. 나아가 21세기에 미국의 스티브 잡스는 바우하우스-브라운사의 유전자를 애플 아이폰 디자인에 이식함으로써 큰 성공을 거뒀다. 바우하우스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데 기여한 한네스 마이어의 극단적 기능주의는 1930년대 미국에서 ‘국제주의 양식’으로 소생해 198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저항을 받기도 했다. 1990년대 이후 세계 경제체제가 도시건축과 디자인의 역할을 ‘무한 욕망의 판타지’를 부풀리는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포장술로 변신시키는 동안에 바우하우스는 한동안 잊혀졌다.

바우하우스 입장권에 예시된 데싸우 바우하우스 건물 전체의 항공사진. 김민수 교수 제공
바우하우스 입장권에 예시된 데싸우 바우하우스 건물 전체의 항공사진. 김민수 교수 제공
그러나 2010년대 후반에 이르러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휩쓸고 지나간 쓰나미의 잔해 위에서 그 이념에 다시 주목해야 할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금융 위기에 따른 경기 침체와 장기 불황 속에서 공공서비스의 민영화로 삶의 기준은 저하되고,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바우하우스가 제안한 ‘조립식 산업제품으로서 주택’의 필요성이 부활하고, 실물 경제와 제조업 붕괴 그리고 환경오염의 현실 속에서 인간 삶과 디자인에 대한 재고와 성찰이 심각하게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 국내 대기업이 선보인 프리미엄 가전제품을 위한 초현실주의 광고 ‘가전, 작품이 되다’는 한국 사회에서 건축과 디자인이 현재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지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처럼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는 일이다. 앞서 봤듯이 백 년 전 바우하우스는 건축과 디자인이 작품이길 거부하고, 정신혁명을 통해 당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예술’을 위해 분투했다.

세상이 각박하고 힘들 때 인간은 꿈을 꿔야 살 수 있다. 하지만 이 꿈은 건강한 현실과 함께 해야 한다. 굳이 4차 산업혁명을 말하지 않아도 새로운 기술과 환경 생태계의 변화 속에서 인간 삶과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지속가능하게 구축해 나가야 하는가의 고민이 더욱 절실한 때다.

김민수/서울대 미술대학 디자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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