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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문화일반

[세상에 띄우는 편지] ‘세상의 밥짓기’를 끝낸 누나에게 / 유용주

등록 :2009-01-07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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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주/시인·소설가
유용주/시인·소설가
세상에 띄우는 편지
누나,

새해 첫날 누나의 전화를 받고, 이 못난 동생은 아주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누나의 작은 등에 업혀 꼼지락거리며 바라봤던 부산항 제1부두 뱃고동 소리를 들었어. 서면 굴다리를 지나 폭탄 연기 같은 수증기를 뿜어내며 달려가는 기차의 기적 소리를 들었어. 동래에서 송도까지였던가, 처음 타보는 전차의 뎅뎅뎅 종소리를 들었어. 그때 젖먹이였던 내가 맡았던 수제비 냄새, 눈깔사탕, 문둥이빵, 태풍에 쓰러진 고목나무, 전도관 풍경을 떠올리면, 어떤 예감이 벼락처럼 떨어졌는데, 그것은 내 인생 전체가 슬프지만은 않을 거라는, 거칠면서도 보드라운 무엇이 있을 거라는 거, 누나의 등처럼 따사로운 햇살이 비출 거라는 근거 없는 낙관이 잔파도만큼이나 옆구리를 적셔 왔어.

누나, 그러니까 열 살 조금 넘은 쪼그만 계집애였던 누나가 동생들을 차례로 업어 키우고 공장에 나가는 엄마를 대신해 부엌살림을 하면서 시작된 세상의 밥 안치기, 세상의 설거지들이 50년 가까이 이어져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끝이 났으니, 누나는 평생 물로 살아온 거야. 밥으로 살아온 거야. 물이 되어 밥이 되어 흘러온 거지.

그러니, 누나는 물로 흙을 빚어 생명을 살리고 물로 불씨에 숨을 불어넣고 물로 삶의 공든 탑을 쌓아 올린 거야. 물로 빚어 놓은 가장 단단한 마음, 그래서 어떠한 역경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던 거야. 물이야말로 가장 겸손한 돌 아니었던가. 가장 자애로운 햇빛 아니었던가. 가장 부드러운 바람 아니었던가.

누나, 일찍이 쌀 스무 가마니에 누나를 팔아넘긴 아버지에게도, 아버지의 완력 앞에 속수무책인 어머니에게도, 삼류 깡패가 되어 감옥이나 들락거리던 오빠에게도 버림받았지만, 밤톨 같은 남동생 세 명을 먹이고 재우고 학교 보내고 용돈 주면서 키웠지. 병든 남편을 먼저 보내고 아이 두 명을 훌륭하게 길러냈어. 누나는 그 억센 자존심으로 세상의 주방에 꼿꼿이 서서, 지지면서 참고 볶으면서 어울리고 끓이면서 울고 비비면서 웃고 데치면서 다치고 절이면서 다독이고 고아내면서 가라앉고 튀기면서 날아오르고 졸이면서 가슴 저리고 설거지하면서 설움을 씻어내고 분노를 닦아내고 슬픔을 흘려보내며 또다시 밥을 안친 거야.

누나,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세계를 들어 올린다’는 말이 있지? 은퇴 뒤의 삶에 대해 묻자, 누나는 공부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그랬어.

그래, 초등학교 2학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인 누나가 중국어와 일어, 영어를 구사하고 컴퓨터를 마음대로 다루는 날이 곧 올 거야. 그것보다는, 교회에 나가 밥을 푸고, 병원 가서 아프고 힘든 사람들과 함께한다니, 나는 그저 물결로 뭉친 작은 부처를 보는 것 같아.

이제 누나의 삶은 가족을 뛰어넘어 더 많은 이웃이 기다리고 있는 넓은 바다로 나아가는 거야. 더 춥고 더 낮은 곳에 있는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밥을 안치고 찌개를 끓이는 누나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봄은 이미 우리 옆에 와 있는 거야.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더워진다’(미슐레)는 말을 나는 믿어.


누나, 그동안 고생했어. 누나는 누구보다도 쉴 자격이 있어. 이제 정말 아름답게 늙어가는 거야. 수심 5000m 위에서 바라본 인도양 노을처럼.

유용주/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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