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1.10 17:22
수정 : 2007.01.10 17:22
TV 보는 남자
비보이는 왜 유명할까. 하위문화 춤꾼 비보이들을 지상파 티브이 뉴스 앵커가 상찬하고 연예 가십 리포터가 열렬히 소개하고 시에프(CF) 업계마저 포옹하게 된 것은 왜일까. ‘우리나라’ 비보이가 ‘세계를 석권’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경연장에서 백인 관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응원하는 그 장면이 감격스럽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해 비보이들은 세계 대회에서 ‘메달’을 따지 못했다면 ‘삐뚤어진 양아치’, ‘지멋대로인 낙오자’의 이미지를 벗기 어려웠을 것이다.
비보이의 문화적 가치나 비보이들이 원망했고 깨뜨리고 싶었을 우리 사회의 감옥 같은 구조 따위는 이야깃거리가 안 된다. 고리타분한 좌파 문화론의 시각에서 평가해 본다면 비보이는 가장 빠르게 주류에 포섭되어 국가주의의 아이콘을 짊어지게 된 사례라 할 수 있다.
비보이가 등장하는 한 은행 시에프가 단적인 예이다. “나는 춤을 추는 게 아니다. 대한민국 일등이 세계 일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난 보여줄 것이다”라고 비보이는 다짐한다. 그러나 진심일 리가 없다. 즐겁게 춤을 추고 기예를 익히고 친구들을 얻으면 행복할 아마추어 개인주의 비보이도 많다. 이제 세계 최고가 된 비보이도 다들 그렇게 출발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비보이에게 춤은 유희와 자기 증명을 위한 방편이었고 세상과 맞서는 무기였을 것인데, 시에프 속의 비보이는 애국자로 분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비보이들에 대한 숱한 보도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경향인데, 비보이들의 진정한 ‘나’를 지워버리고 국가 대표의 신성한 자리에 앉히는 것은 일종의 상징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보이 현상에서 ‘나’의 실종 내지 ‘나’의 휘발을 본다면, 소비 주체인 시민들은 ‘나’의 과잉을 강요 당한다. 한 신용 카드 시에프 모델들은 “주말을 즐기는 나를 위해”, 혹은 “해외여행 자주 가는 나를 위해” 카드를 쓴다고 했다. 이동통신사의 시에프는 “거짓말을 덜 하는 내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내가,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내가 나는 자랑스럽다”고 했다. 현기증 나는 자기 분열이다. 첫번째 ‘나’를 좋아하는 두번째 ‘나’를 세번째 ‘나’는 좋다는 식이다. 자신의 욕망과 쾌락을 절대 선에 올려놓는 무시무시한 선언으로 읽힐 수도 있다.
주류의 세상으로 들어오기 위해 비보이는 ‘나’를 잃었다. 소비 대중은 ‘나’에 집착한다. 물론 두 종류의 ‘나’는 다르다. 하나가 반역적이라면 다른 하나는 기업 친화적이다. 하나는 일탈적이며 다른 하나는 표준적이다. 나를 무한정 사랑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사자나 참새가 아니라면 완벽한 자기애를 누릴 수 없다. 주류의 소비 대중들은 적당히 자학하며 살아야 하고 비주류에서 유입된 비보이들에게 ‘나’의 거세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비보이들이 갖고 있을 - <라디오 스타>의 최곤 만큼이나 - ‘거친 쏘울’에 대해 이야기하자.
이영재/웹진〈컬티즌〉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