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얄타: 8일간의 외교 전쟁
세르히 플로히 지음, 허승철 옮김/역사비평사·4만5000원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부터 1991년까지의 국제질서를 일컫는 다양한 명칭이 있지만 ‘냉전 체제’만큼 자주 쓰이는 용어가 ‘얄타 체제’이다. 1945년 2월에 열린 이 8일간의 회담에서 제기된 광범위한 의제들이 전후 국제질서를 규정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당시 중요 안건들을 살펴보면, 폴란드를 포함한 동부 유럽의 국경선 문제와 전후 독일의 처리 그리고 유엔(UN)의 구성과 표결권 문제 등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질서 구축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들이 이 회담에서 포괄적으로 다뤄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잘 알려져 있듯이 여기엔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질서와 관련된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래저래 얄타 회담과 얄타 체제는 냉전시대 당시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연구자와 저술가들의 관심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회담 자체에 집중한 전문 연구들은 비교적 최근에야 시작되었고, 그마저도 자료 접근성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대동맹의 주축인 미국, 영국, 소련 지도부의 얄타 회담 과정과 그것과 관계된 다양한 사건들에 대한 심층적 저술이 드물었던 까닭이다. 이런 점에서 세르히 플로히의 <얄타: 8일간의 외교전쟁>은 매우 중요한 저작이다. 저자는 러시아 출신의 미국 역사학자로서 소련 붕괴 이후 문서고 혁명(archival revolution)을 통해 개방된 구소련의 것을 포함한 미국, 영국, 러시아 삼국의 방대한 자료들을 수집, 분석해 이 저서를 완성했다. 책에 소개된 회담의 상세한 과정과 그것을 전후한 사건 전개는 이러한 노력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저자는 전후 세계질서 재구축의 결정적 계기였던 이 회담을 그 준비과정부터 종결까지 매우 생생하게 보여준다. 특히 주목할 점은 기존 연구서들과는 달리 이 책이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과 그 주변의 핵심 참모들을 주인공으로 한 한편의 소설과 같은 전개를 펼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물 중심의 이야기 전개가 빠뜨릴 수 있는 주변 정세와 사건의 구조들까지 다각적 서술로 보충하고 있다. 덕분에 독자들은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역사 이야기에 한층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책은 8일간의 회담을 위한 루스벨트와 처칠 그리고 주변 인물들의 여정부터 출발한다. 저자는 회담장인 리바디아 궁전과 관련해서 예카테리나 2세 시기부터 크리미아(크림) 전쟁시기까지 이어지는 러시아의 흑해 연안 진출 노력에 대한 일화들을 언급한다. 헤로도토스나 파우사니아스와 같은 고대의 역사가들이 그랬듯 본격적인 서술 전 이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장소 및 그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여러 가지 주변 배경 이야기들로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 모은 것이다.

회담의 주인공 가운데 한명인 스탈린과 그 측근 인물들의 회담 준비 과정은 도입부의 또 다른 볼거리다. 서방에서 내놓는 스탈린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서술을 반복하지만 지은이는 서방세계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는 문화적·인식적 차이 또한 언급하며 획일적인 평가를 경계한다.
그 뒤로는 본격적으로 얄타 회담의 생생한 현장이 그려진다. 2월4일 리바디아 궁전 무도회장에서 연 세 거두의 첫 회담 분위기는 비교적 원만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저자는 소련이 회담에서 전반적으로 여유를 가진 모습을 의도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회담 직전의 전세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과연 전쟁 중 외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군사력과 그를 바탕으로 한 전략상 우위라는 점을 강조한 포석이다. 유럽 전선의 전투 양상 분석 가운데서도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이 기여한 점을 이 책은 제대로 평가한다. 상대적으로 소련군의 성과를 과소평가해온 기존 서방 세계의 편향된 시각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2월5일부터 8일까지 진행된 회담의 전개 과정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 중 하나이다. 주된 의제들은 전후 독일 처리, 전쟁 배상금, 전후 폴란드 및 동부 유럽 국가들의 전후 국경선 설정과 정치체 건설, 발칸 반도 국가들에 대한 처리, 소련의 태평양 전쟁 참전과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재편 그리고 전후 국제질서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할 새로운 국제기구인 유엔의 의사결정 방식 등이었다. 이를 둘러싸고 삼국의 지도자들과 주요 참모들은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폴란드 문제다. 서방 연합국과 소련 사이에 가장 이견이 컸던 폴란드 정부 구성과 국경문제에서 처칠,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말의 전쟁을 이어갔고, 회담장에서의 논쟁으로 해결되지 않자 루스벨트는 직접 스탈린에게 서신으로 입장을 전달했다.
저자는 이 긴장된 회담의 과정을 서술하면서 얄타 회담에 대한 기존 통념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국과 미국이 손을 잡고 스탈린을 압박하여 서방연합국의 공동이익을 달성했을 것이라는 통념이다. 실제 협상을 전후한 시기 정세 및 전세 그리고 실제 회담 과정은 완전히 달랐다. 당시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있던 루스벨트는 실제로는 4기 대통령다운 노련함으로 회담에서 미국이 원한바, 소련의 대일본 전선 참전 약속 같은 결과를 얻으면서 소련과 영국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소련이 이 회담에서 처음부터 상당히 우월한 지위를 차지했던 건 당시 군사적 상황에 기인한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2월8일 진행된 스탈린과 루스벨트의 마지막 회담 과정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특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바로 이때 전후 한반도의 처리 문제가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을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새로운 강대국으로 설정해 아시아의 새 질서를 만들려는 루스벨트의 안에 스탈린도 우여곡절 끝에 동의하면서 한반도에 대한 처리 문제까지 언급된 것이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전후 한반도의 처리에 큰 이견이 없었다. 두 나라는 테헤란 회담에서 제안되었던 ‘신탁통치’ 안을 합의했고 이를 미국, 중국, 소련이 맡되 영국이 이의를 제기할 땐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 상당히 충격적인 것은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 데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얄타 회담은 대동맹 구성국들 간 협의의 틀을 지켰으나 그들 사이의 이견이 가감 없이 표출되는 장이기도 했다. 전후 냉전, 미소 대립의 출발점으로 얄타 회담이 자주 지목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저자는 회담 과정을 상세히 기술하면서 이후 국제 정세의 변화 과정과 루스벨트 사후부터 1945년 7월 포츠담회담에 이르기까지 얄타 회담에서의 합의 정신이 어떻게 틀어져가는지도 추적한다. 대동맹의 협력적 틀이 절정을 찍었던 시기에 어떻게 곧장 냉전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셈이다.

책 자체가 쉬운 편이 아닌데다 외교사의 중요 장면을 한 편의 소설과 같은 서사를 통해 설득력 있고 이해하기 쉽도록 구성했기에 번역을 할 땐 일반 연구서에 견줘 훨씬 더 세심한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러시아 지역학과 국제정치학의 권위자인 허승철 교수는 그간 외교관으로서의 경험과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 지역학 학자로서의 전문성을 발휘하여 독자들을 배려한다. 역자가 후기에서 밝힌 것처럼 이 책 곳곳에는 남-북, 북-미, 한-미, 북-중, 북-미 등이 벌이고 있는 수 싸움에 활용할 수 있을 만한 정상간 외교의 여러 기술과 협상 전술이 숨어 있다. 얄타회담에서는 각국의 협상 의제에 따라 가까운 동맹과의 이해관계는 뒤로하고, 멀어 보이던 적과 손을 잡는 일도 적지 않았다. 국내 정치의 압박이 대외 정책 결정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장면도 자주 등장한다.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합의라도 실패의 요소가 내포될 수 있음을 잊지 않고 협상에 임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운다. “실패한 정상회담은 없다”라는 말이 있지만 “완벽하게 성공하는 정상회담도 없다”는 교훈을 이 책에서도 새길 수 있을 것 같다.
김동혁 광주과학기술원 기초교육학부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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