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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생각

페미니즘 시대 ‘비엘’ 논쟁 뜨거운 까닭은

등록 :2019-05-17 06:00수정 :2019-05-17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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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창작·향유하는 남성 성애물
“성별위계 반영…탈비엘하라” 논란
젠더 전복적 캐릭터 기대와 비판도
오른쪽은 국내 비엘로 인기가 높은 <드레스 코드>.
오른쪽은 국내 비엘로 인기가 높은 <드레스 코드>.
여성이 스스로 만들고 향유해온 ‘여성향’(女性向) 장르인 비엘(보이스 러브, 남성 간 성애물)이 논란과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래디컬 페미니스트(펨)들이 비엘물을 거부하는 운동인 ‘탈비엘’을 주장하면서 찬반 논란이 벌어지는 등의 역동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팬덤을 만든 향유자 여성들의 성적 주체성 논쟁이자 사회적 이데올로기와 길항하는 하위문화의 성격을 보여준다.

비엘은 거슬러 올라가면 1980년대 하이틴로맨스물의 유행 등 로맨스물에 대한 여성 독자의 선호, 욕망의 계보를 잇는 것으로 분석된다. 80년대 이후 아마추어 만화동호회가 인기 만화 캐릭터들을 원하는 대로 각색하는 패러디를 시도했고, 이런 동인지문화 속에서 90년대 일본에서 유입된 ‘야오이’ 문화와 한국의 남성 아이돌을 주인공으로 한 ‘팬픽션’ 문화가 호응하며 여성이 즐기는 하위문화로 비엘이 정착했다. ‘동인녀’ ‘후조시’(썩은 여자라는 뜻의 일본어, 멸칭이자 자조적 명칭)라 일컬어진 여성 비엘 향유자들은 오랫동안 폐쇄적인 커뮤니티 중심으로 활동했다. ‘변태’적이고 ‘음란’한 남성간 성교 이야기를 그리거나 쓰고 읽는 여성은 비정상이라고 낙인 찍는 외부자의 시선을 의식해야 했던 탓이다. 은밀하게 취향을 즐길 수 있는 모바일, 전자책 기술의 발전에 따라 2015년께 양지화한 ‘비엘 산업’은 최근 급성장했다.

일본에서 출간된 비엘 문화총괄서 <비엘 진화론>.
일본에서 출간된 비엘 문화총괄서 <비엘 진화론>.
<한겨레>가 교보문고, 알라딘, 예스24 등 주요 유통사들에 질문한 결과, 모두 전자책 시장에서 비엘의 성장세가 두드러진다고 답했다. 알라딘의 경우, 전체 전자책 매출 대비 비엘 비중(소설+만화)이 2017년 7월 13%에서 2019년 2월 현재 30% 이상까지 높아졌다. 2018년 말 비엘의 매출성장률은 전년도 대비 126.2%로, 급성장했다. 알라딘 전자책팀 김진영 대리는 “비엘 장르가 전자책 시장에서는 메인스트림으로 합류했다는 점에 대해 이견이 없을 정도”라고 밝혔다. 예스24 역시 올해 전자책 매출 중 비엘 분야의 비중이 20%는 거뜬히 넘을 것으로 보인다. 교보문고의 경우, 비엘이 상업화되기 시작한 2015년과 2016년 각각 월평균 매출성장률이 213%와 211%로 급성장세를 보였다.

국내 만화 <오덕후 이야기-보통 연애, 다들 하고 계십니까>(한송이)의 한 장면.
국내 만화 <오덕후 이야기-보통 연애, 다들 하고 계십니까>(한송이)의 한 장면.
업계의 분석을 종합하면, 비엘물 최대 유통사라 할 수 있는 리디북스의 2018년 비엘 분야 예상 매출액만 2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리디북스 쪽은 관련 데이터를 일체 공개하지 않았지만 “업계가 매출 예상치를 조금 높게 잡는 것 같다”고 전했다. 2019년 5월 현재 리디북스에 등록된 비엘 소설 단행본 총 5915건 중 리뷰가 가장 많은 비엘 소설 <시맨틱 에러>에 달린 글은 1만2200여건이나 된다.

지난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에서 연 공동학술회의 마지막 세션에서 발표된 ‘페미니즘 시대, 보이즈 러브의 의미를 다시 묻다: ‘탈BL’ 담론의 분석’은 250여명 청중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 냈다. 사진 이유진 기자
지난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에서 연 공동학술회의 마지막 세션에서 발표된 ‘페미니즘 시대, 보이즈 러브의 의미를 다시 묻다: ‘탈BL’ 담론의 분석’은 250여명 청중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 냈다. 사진 이유진 기자
이런 가운데, 지난 11일 오후 한국여성문학학회와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인문한국(HK+)연구소가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에서 연 공동학술회의에서 발표된 ‘페미니즘 시대, 보이즈러브(Boy’s Love)의 의미를 다시 묻다: ‘탈BL’ 담론의 분석’은 250여명 청중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 냈다.

한국·일본의 비엘 문화 연구를 천착해온 김효진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는 이날 “현재 비엘 비판과 비엘 옹호 모두 ‘페미니즘’이라는 틀 안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다. ‘생물학적 여성’ 정체성을 중시하면서 ‘탈비엘’을 주장하는 ‘펨’들은, 비엘이 남자주인공만 등장하고 여성 캐릭터를 배제하는 남성중심적 서사라고 비판한다. 또한 남-남 주인공의 관계도 남녀의 섹스처럼 ‘삽입권력’을 가진 이가 성적으로 우위에 서는 재현구도를 만든다고 본다. 곧, ‘남성-강자-공’이 우위에 서고 ‘여성-약자-수’가 아래 위계를 점하는 식으로 현실 남녀의 권력관계를 반영하고 강화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탈비엘론자들은 비엘을 남성 숭배와 여성 타자화 또는 혐오의 장르로 평가하는 반면 비엘 옹호론자들은 비엘이 여성이 주체적으로 창작하고 향유해온 거의 유일한 장르라고 맞선다.

‘탈비엘’을 밝히는 사진. 트위터 화면 갈무리
‘탈비엘’을 밝히는 사진. 트위터 화면 갈무리
김 교수는 “10~20대 중심의 탈비엘론자들은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를 맞아 예전 자신이 봤던 비엘 책과 만화를 찢고 파괴한 뒤 ‘#탈비엘’ 태그를 달아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게재하기도 한다”고 밝혔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일부 탈비엘론자들이 “바람직한 여성서사로서 여-여 캐릭터가 등장하는 지엘(걸스 러브·GL)을 쓰라”는 등 비엘 작가를 압박해 작가가 법적 대처까지 천명하기도 했다는 데서 “비엘 작가들에 대한 공격이 페미니즘이란 이름으로 저질러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30년 전부터 한국 여성들이 열렬하게 받아들인 여성 중심 팬문화와 창작 문화라는 의의도 망각되고 있다”고 김 교수는 경계했다.

‘탈비엘’ 담론은 2000년대 이후 <왕의 남자> <후회하지 않아> 등 남성동성애를 테마로 한 영화 흥행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른바 ‘브로맨스’로 일컫는 남성 연대로 재현한 영화(“알탕영화”)만이 득세하고 여성 캐릭터가 삭제되는 흐름 속에 “한국의 후조시 문화가 결국 여성을 배제한 콘텐츠 양산에 기여한 것은 아닌지” 성찰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손희정 문화평론가(연세대 젠더연구소)는 “탈비엘은 ‘탈코’(‘꾸밈 노동’을 내려놓자는 ‘탈코르셋’ 운동) ‘탈혼’(결혼제도에서 벗어나기) ‘탈성애’(성애에서 벗어나기) 등 ‘펨’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탈’운동의 한 흐름”이라 분석했다. 손 평론가가 <페미니즘 리부트>(2017)에서 제기한 주요 질문은 비엘 문화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한국 영화 또는 정당정치가 ‘브로맨스 코드’를 활용하면서 여성 팬덤을 이용하는 한편, 여성을 소외시키는 효과를 낳은 데 대한 문제제기였다는 것이다.

비엘의 하위장르 ‘오메가버스’를 다룬 작품.
비엘의 하위장르 ‘오메가버스’를 다룬 작품.
최근 비엘 구도에는 많은 변화가 생겨, 능동과 수동(삽입/흡입)으로 동일시되던 남녀 성별 위계를 교란시키는 성격의 작품들도 늘고 있다. 이를테면 강한 여성성 캐릭터와 약한 남성성 캐릭터가 만나는 식이거나 임신·출산의 주체가 남성이 되는 식이다. ‘한국 BL 소설의 섹슈얼리티 연구: 오메가버스를 중심으로’(2018, 연세대대학원 국문학과 석사논문)를 쓴 이현지씨는 “최근엔 여성에게 부과되었던 젠더적 제약을 남성체에게 전가하고 타자로서의 위치를 남성 캐릭터에게 전가하면서 남성성을 유희하는 움직임도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또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비엘을 둘러싼 긴장이 생기고 있지만 ‘여성이 여성을 먹여 살리는 시장’인 이 여성 산업의 계보와 의미도 탐구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다양한 국내 비엘물들.
다양한 국내 비엘물들.

다양한 국내 비엘물들.
다양한 국내 비엘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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